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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보드 4.0의 일기(日記) 이곳은 '제로보드 4.0'에 있던 내용을 추출하여 되올린 곳인데... 간혹 게시판의 하단 내용에 이상이 생긴다. 그렇지만 봉사로 있다가 무려 6년만에 다시 눈을 뜬 것만 같다. 또한 글을 쓰던 예전의 기억을 떠올려 볼 수 있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너무 기쁜 나머지 이정도만해도 과분한 것 같다.

4. 양식기 공장에서...(1) 날아가는 오리 (2)

2007.06.13 21:10

문학 조회 수:3121 추천:2



  내가 어렸을 때 보았던 공장은 대략 3만평 정도의 언덕 위에 비스듬히 위치하였으며 높은 지대이다 보니 축대를 쌓고 그 위에 담을 쌓았다.

  우리 집은 언덕 위에 있었으며 거리상으로 500여 미터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공장 뒤 쪽을 내려다보듯이 쳐다 볼 수 있었다. 생산하고 남은 불량품, 쓰러시, 고철 등을 쌓아 놓는 장소가 담과 연하여 있었는데 가끔가다가 폐품을 실는 화물차량이 담의 반대 쪽 도로변에서 축대쪽으로 세워 놓았고 그 위에 공장의 쪽문을 열고 폐자제와 불량품들을 내려 실곤 햇었다.  도로변에 화물차가 서 있을 때 옆을 지나가다보면 불량품으로 된 생산 제품들이 차량 주위에 떨어져 있었다. 나는 어린 시절 삼지창처럼 생긴 포크를 집어들고 친구들과 땅에 금을 긋는 것으로 사용하곤 하면서 놀곤 했었다. 자라면서 동네를 뛰어 다니며 보아왔던 공장을 나는 무척 호기심을 많이 갖게 되었지만 그곳에 다니게 되리라는 사실은 꿈에도 꾸지 못하였다. 그곳 담에 차를 세우고 위에서 고철더미를 차에 실을 때는 으레 생산제품의 불량품들을 줍곤 했었는데 그 중에 가장 흔한 것이 포오크(pook)였었다.

  처음에 판자촌처럼 무허가로 주택들이 달동네에 들어서더니 이제 어느 정도 생활들이 펴서 그런지 이웃한 양식기 공장을 민원의 대상으로 삼고 끊임없이 환경청에 고발이 끊이지 않았다.

  "소음이 너무 많아서 잠을 잘 수 없어요!"

  "매캐한 연기가 남니다!"

  그렇게 소음과 분진에 대하여 고발장을 접수했으므로 환경청에서 여러차례 조사를 해 갔지만 아직까지는 건재하였다. 물론, 이 건재하였다는 표현은 우리나라가 개발도상국가였으므로 환경에 대하여 많은 구속력을 갖지 않아서 하천은 오염된 간장빛으로 죽은 물로 흘렀으며 하늘로 검은 연기를 뿜어대는 공장의 굴뚝조차 방관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적 배경을 뜻하는 것이다.

  나도 어려서부터 들어왔던 윙윙 거리는 소음을 듯고 자란 탓으로 항상 귀속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왔는데 시골인 외가집에 가면 조용한 곳에서도 그 소리가 들렸다.  이 공장에  근무하기 시작하면서 요란한 소리가 바로 후황(바람을 뿜어내는 거대한 공업용 송풍기)과 기계에서 나는 소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략적으로 주택가와 인접한 양식기 공장에 대한 궁금증은 내가 군대를 갖다오고 그곳에 입사를 하게 되면서 풀렸지만 무슨 마음으로 회사의 정문에서 경비에게 입사원서를 들이밀며,
  "취직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고,

  "그래요, 그럼... 따라 와...요! 의외라는 표정으로 경비가 아래 위로 나를 흩어 보았다. 그 표정이 자뭇 냉소적이다.

  "오늘 부터 일할 수 있었요?"

  "따라와요!"

  경비는 이런 일에 익숙해 있는 듯이 말했으며 그는 나를 데리고 사무실로 가지 않고 곧장 작업 현장의 일개 반장에게 소개를 해 주웠는데 이곳은 모두 경비가 총무과를 총괄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젊고 건장한 느낌을 부각시키려는 행동을 읽은 것일까?'

  나중에야 알았지만 왕성한 육체가 이때만큼 절실한 적도 없었을 것이다. 노동일이란 모두 그렇듯이 어느 직장이건 생산자들을 찾는 곳은 한결같이 육체적인 반복 노동에 동원시킬 수 있는 새로운 인원을 충원시키고저 혈안이었다. 먼저 있던 봉제공장들과 지금 자신이 입사하겠다는 양식기 공장 역시도 자신의 젊고 왕성한 패기와 육체를 매수하기 위해 혈안이었으므로 경비가 그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지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 일찍 출근 시간에 맞춰 입사하겠다는 뜻을 밝힌 내게 경비가 친절하게 보내준 곳은 광연마라는 곳이었다. 공장의 정문에는 항상 사원모집 광고판이 버젓이 붙어 있었다.

" 생산직 사원 항시 모집
  생산직 남여 00 명 "

  여기서 내가 양식기 공장에 취직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들자면 시대적인 배경이 깔려 있었다.
  나는 상업 고등학교 3 학년 초에 학교에 가기 싫어서 인근의 봉제 공장에 취직을 하였다. 그리고 취직 증명서를 학교에 제출하여 실습을 나간 것으로 체크가 되었다. 부친의 무능력으로 모친은 온갖 허드렛일을 하였으며 그 중에서 머리에 다라(광주리)를 이로 강냉이(옥수수) 튀밥과 세탁비누를 갖고 다니면서,
  "고물 팔아요! " 하며 고물 장사와 대 도로면에 야외용 아이스크림 장사를 시작하여 여름 방학 내내 내가 대신하여 장사를 하다가 아이스크림을 퍼 먹고 삥땅을 치기도 했었다. 그런 실정에 사형제 중에 장남인 내가 빨리 졸업을 하여 취직을 하는 것이 집안 사정상 형편이 나아질 가장 유일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므로 고등학교 시절 나는 공부는 하지 않고 책상 밑에 세계 문학을 펼쳐 놓고 섭렵하였으니 학교 성적이야 오죽하겠는가! 지금에 있어서 그것이 내게 문학적인 꿈을 키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시내 헌책방에서 값싼 세계 문학책들은 여성 잡지에 부록으로 나온 책이어서 두툼하면서도 값이 무척 쌌다. 나는 헌책방을 전전하면서 값싼 책만을 골라서 샀으며 그 딱딱한 내용의 책들을 학교 수업 시간에 책상 밑에 펼쳐 놓고 있곤 했었다.
  ‘테스, 제인 에어, 페스트,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좁은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이방인…….’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세계 문학책을 읽으면서 나는 문학에 대한 꿈을 키웠는데 그 당시에 어찌 보면 학교 수업을 별로 관심이 없고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취업을 준비하는 상업 고등학교이기 때문에 그렇게 성적에 대하여 단속하지 않았던 탓도 있었다.
  어쨌든 고등학교 3 학년 시절 처음 취업한 봉제공장에서 카톤 박스에 완성된 와이샤쓰를 각 색상 사이즈별로 분류를 하는 완성부에서 시다(견습공) 생활을 했다. 많은 작업 시간, 저임금, 단순박복, 외주 하청한 실밥을 따는 와이셔츠의 숫자를 세고 검사하는 일 등을 도맡았었다. 그 중에 카톤 박스를 어깨에 메고 컨테이너 박스에 넣는데 규모 있게 여러 차례 재 시도를 해가면서 빈 공간 없이 남는 분량을 모두 넣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는 기지를 발휘하곤 했는데 그 때마다 카톤 박스는 걸레처럼 찢기고 제품만 좁은 공간으로 밀어 넣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모두 실은 뒤에는 좁고 꼭 막힌 컨테이너에서 땀으로 범벅이 되곤 했었다. 이렇게 노동일을 하면서 새로운 사회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하면서 깨달은 바로는 기술을 습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그 때까지는 어쩔 수 없이 중노동이라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벌이를 해야만 장남으로서 책임을 다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생활은 내게 일대의 혁신과 전기(前期)를 몰고 왔었다.
  ‘봉제 공장이 아닌 다른 공장을 찾아보자!’
  우연한 기회에 출근한 봉제공장 앞에서 회사가 밀린 봉급을 주지 않는다고 여종업원들이 모두 작업을 중단하고 시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어제까지만 해도 그 봉제공장 앞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밀린 봉급을 받기 위해 기다렸었다. 그런데 마냥 기다린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었으므로 포기하고 말았던 것이다. 지나가는 거지에게 적선하는 셈치고 새로운 일거리를 찾는 게 급선무였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