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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노인의 성장과정

2009.10.21 09:05

文學 조회 수:3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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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중에 있어서 부친의 얘기 중에 모친에 관계하는 얘기가 기록이 된다. 그리하여 어머니의 초상이 함께 쓰이는 것이 자연스러울 듯 하다.

  1950년 6월 25일 일어난 전쟁은 19세 소년과 누이에게 있어서 피난길을 재촉하게 하였다. 그리고 부산에서의 피난 생활과 군 입대를 하여 제주도에서 훈련을 받는다. 안 노인에게 제주도의 훈련 생활과 그 뒤 부산의 방어선에서 배치를 받게 되고 진지에서 적의 총격을 받게 되어 군병원에 입원하여 왼쪽 어깨와 팔에 골절상을 입고 입원을 하여 인공뼈를 주입하게 된다. 그 수술로 의가사(의가사) 제대를 하여 결국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의지할 곳은 누이 밖에 없었다.

   누이는 혼기가 차서 결혼을 하였는데 남자의 외향은 키 150센티 정도에 체중이 70kg 으로  몸이 옆으로 벌어진 과대 비만형의 직업이 운전 기사인 남자였다. 마치 오뚝이처럼 보일 정도였는데 그런 사내를 누이가 좋아한 이유는 한가지 돈을 잘 번다는 사실 한가지 였다. 누나에겐 남자의 인물됨보다 돈에 가장 큰 기준이 되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어린 시절의 가난 때문이었다. 그 남자가 어디가 좋았을까 싶었지만 두꺼비를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나이가 들수록 더 비만이다가 결국에는 55세에 병에 걸렸고 그 당시에 보험이 전무하다보니 10년 동안의 병원비로 전제산을 모두 날리게 되어 거지처럼 셋방을 전전하던 모습을 몇 번보다가 그것도 찾아 갈 수 없이 이사를 다녔으므로 만나지 못하고 소식이 끊기었다. 그 쪽에서는 전혀 왕내를 하지 않는 이상한 관계였다. 하나 밖에 없는 피줄이었지만 안노인은 자신의 누이조차 관계를 유지하는데 부족했다. 그의 성격상 조모의 묘지를 찾지 못하였는데 산소를 잃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어느곳에 묘지를 안장했는지 찾아가지 않아서 그만 잃어 버린 것이다. 그는 그처럼 자신이 사회에 무관심했다. 아니 어찌보면 자신의 아내인 최여사의 내조가 없었다면 인간 구실을 할 수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매형은 10년 정도 병원 신세를 지게 되는데 병 수발로 남은 것 하나 없이 가족들은 부자 축에 들던 모든 재산을 병 수발로 탕진하고 결국에는 셋방 신세로 전전하다가 더 이상의 병원비를 감당하지 못하여 결국 퇴원을 하였고 죽기 전에는 마른 명태처럼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몰골로 구석진 방에서 임종을 맞았다. 매형의 직업은 군대에서 배운 운전기술을 발휘하여 화물차를 구입하여 용달업에 뛰어 들었는데 한마디로 돈을 쓸어 담았다. 불과 몇 년 사이에 도로변의 상가 건물이 딸린 ㄱ자 형태의 주택을 장만하여 이사를 하게 된다. 이 주택에서 20년 정도를 변함없이 살았던 누이와 매형은 6남매를 낳고 살았지만 20년 뒤의 생활은 5년간의 병환으로 가사를 탕진한 뒤에 거지와 같이 빚더미에 남아 난 게 없었다. 


  비록 자신의 집은 아니었지만 군대에서 골절 부분에 봉합, 인공뼈 삽입 수술을 한 뒤 작은 파편은 그대로 병가사 제대를 하게 되었다. 그가 군대에 입대한 2년 동안 누이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운전사와 눈이 맞아서 아이를 낳고 살림을 하여 두 아이의 낳았는데 아들과 딸이었다. 부친은 딸과 함께 살고 있었지만 여전히 직업이 없는 반거충이였다. 거기에 다시 식구 하나가 딸리자 두 사람은 향하여 부양할 가족이 생긴 것만큼이 서릿발같이 닦달을 하기 일쑤였다. 사실상 딸자식에게 의지하여 살아야 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비참함이 형용키 어려웠으리라! 또한 그렇게 해서라도 거둬들이는 심정은 억하지 않으면 결코 신주단지처럼 모셔야만 하는 위치에서 그녀는 자신의 부귀에서 재산을 조금이라도 축내는 친아버지와 남동생을 혐오하기조차 했으리라!   


  누이의 180도 바뀐 생활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어려서부터 돈에 대하여 병적으로 집착을 하던 그 성격이 남편이 벌어오는 돈이 가랑잎을 긁는 것처럼 수입이 늘어나는 것에 얼마만한 병적일 정도로 재산을 불려 나갔던 것은 순전히 그녀의 수단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남편이 벌어오는 돈으로 일수를 하고 도로변의 상가 건물을 구입하여 세를 받고 또한 호화로운 저택을 구입하여 남부럽지 않은 재산가로 두각을 나타낸 것은 순전히 구두쇠 역할을 하여 살림살이를 꾸려 나갔기 때문이기도 했다. 남동생을 남편의 조수로 따라 다니게 하고 그에 따른 짐꾼, 일꾼 대용으로 쓰면서도 임금을 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나중에 결혼을 시키고 촌구석 여자라고 구박을 하며 가정부로 온갖 잡일을 도맡겼지만 결코 품삯을 주지 않았다. 그것이 촌티 나는 최 여사가 올케 언니로부터 온갖 학대와 노동착취를 당하면서 근 1년을 참고 지냈었던 것은 어찌 보면 인고의 세월만큼이나 불만을 낳고 원성을 살 수 밖에 없는 중요한 구심점은 제공하기에 이른다.

  그녀는 살아 나가기 위해서는 이곳을 벗어나야만 했고 임신한 몸으로 과감하게 그 집을 나왔는데 무능력한 남편은 그런 아내를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에게 누이는 언제까지 부모 맞춤이었고 태양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런 생활에서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토록 부엌때기 일을 해주고 받은 돈은 전혀 없었으며 분가하겠다고 했을 때도 아무 것도 없이 몸만 쫓겨나듯이 나와야만 했으므로…….


  가난한 신분에서 부자축에 드는 신분의 급상승은 누이는 지독한 구두쇠가 되어 있었다. 그들을 위하여 돈 한 푼 내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먹여주고 재워준 것을 고맙게 생각하여야 한다고 강조할 정도였다.

 

  그들 두 사람이 독립을 하게 된 것은 대단한 모험이었다. 그리고 그 뒤부터 안노인의 삶은 바뀌게 되는데 엄연히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아내 위에 군림하게 되지만 무능력한 탓에 생계를 책임 짓지 못하였다. 그러다보니 모든 일은 아내인 최 여사의 몫이었다. 그녀는 억척같은 최 씨 집안의 피를 물려받았는데 그것은 앞서 이 집안에 시집온 며느리들이 남편의 무능력함을 핑계로 달아난 것과는 대조적인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녀가 자식들에게 헌신한 것은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이었는데 훗날 장성한 자식들이 선대의 무능력한 남자를 양성하여 가족에게 무책임하였던 그런 생활을 청산하게 하는 구심점을 주웠던 것이다. 만약 그녀도 앞서서 결혼했던 고조모와 증조모처럼 무능력한 남편을 떠났다면 그 자식들은 지금처럼 장성할 수 있었을까? 

 

 

 

  새로 구입한 상가가 딸린 고래 등 같은 주택은 자신을 괜히 우쭐대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자신조차 부자 축에 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누이는 아버지와 자신을 학대하였으며 대문이 있는 구석진 방에 기거하게 하였다. 특히 아버지는 냄새가 난다고 하여 아이들과 접촉을 하지 못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할아버지라고 부르지도 않게 할 정도로 외면을 했다. 그곳 대문 옆에 초라하게 만든 학고방의 집에서 마당이나 쓸고 정원을 가꾸는 잡부처럼 인식을 할 정도였다. 안 씨 또한 이곳에서는 외삼촌이 아닌 아버지의 운전 조수였고 일꾼에 불과하였다. 그를 보는 조카들의 눈초리는 모두 누이를 닮아서 차갑고 매서웠고 어려움 없이 컸으므로 자신을 전혀 외삼촌이라고 부르지도 않을 정도였다.

  안노인이 이 집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지는 않지만 사실 우쭐대고 있을 만큼 머리가 좋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담배를 비고 술을 마셨으므로 항시 맨 정신이 아닌 조금 정신 나간 젊은 청년이었고 제 의지가 없었으므로 남에게 항상 싫은 소리를 들었다. 특히 누이가 부르는 온갖 잔소리가 귀에 따가웠고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할 정도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던 것이다. 그는 동생이 아닌 하인과도 같은 취급을 누이에게 당했다. 그런데 그녀에게 한 가지 영특한 생각이 들었다. 남동생을 시골 처녀와 결혼을 시키고 도시로 데려와서 함께 부려먹게 되면 식모가 필요가 없으리라는 생각이었다.

 

  안 노인이 24세 최 여사가 20세 때였다.  

  꽃다운 최 여사는 시골 냄새가 물씬 풍기는 모습이었다. 검은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고 머리는 길게 땋아 내렸으며 그 끝에 댕기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려서 너무 굶주리게 지냈으므로 평생 쌀밥 한 번 배가 터지게 먹는 게 소원일 정도로 농촌의 처녀였는데 부친이 워낙 한량(한심한 사람)이라 7남매를 낳고 연이어 딸을 셋 낳고 아들을 넷이나 낳은 중에 갖은 게 농사를 짓는 것밖에 없는 농촌 생활은 입에 풀칠을 하기조차 어려울 정도여서 봄에는 보릿고개를 어렵게 넘기고 가을에 추수를 하여도 대가족이 연명할 수 없는 소규모의 영 농업이 전부였으므로 제대로 먹고 살기조차 힘들었던 형편이었다. 그래서 세 명의 딸을 일찌감치 돈께나 있는 사람에게 시집을 보내는 게 우선 남아 있는 가족에게는 도움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