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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로 불려진 영도 다리

2022.10.08 16:04

文學 조회 수:248

노래로 불려진 영도 다리(-影島-) - 부산역사문화대전 (grandculture.net)



“너, 다리에서 주워 왔어.”, “말 안 들으면 다리에 도로 갖다 버린다?”

부산 사람은 어린 시절 이런 말을 수도 없이 듣고 자랐다. 여기서 말하는 다리는 다름 아닌 영도 다리이다. 지금은 볼품없이 늙어서 할아버지가 다 된 이 다리가 대체 뭐였길래 어린아이들의 영혼까지 상처를 입히는 말버릇으로 쓰였을까. 다리 아래 푸른 갯물이 흐른 지 80여 년, 영도 다리는 그 세월 동안 근현대 부산이 겪은 격동의 물굽이를 다 지켜본 역사의 말 없는 증인이기 때문이다. 영도 다리는 그러니까, 부산을 대표하는 커다란 상징이었다.

영도 다리의 탄생은 결코 영예롭지 못했다. 일제 강점기 대륙 침략의 야욕을 불태우던 일본이 영도를 군사 물자 보급 및 배후 기지로 삼고자 가설한 것이다. 다리 상판을 들어 올리는 ‘도개교(跳開橋)’로서 ‘우리나라 최초’라는 기록을 갖는 이 다리는 하늘로 솟구치는 그 신기한 광경 때문에 부산의 명물로 우뚝 섰다.

“영도 다리, 거기서 만나자.” 명물 중 명물이었으니 영도 다리는 6·25 전쟁 당시 피란민들이 기약 없이 헤어진 가족들과의 만남을 꿈꾸는 간절한 소망의 공간이 되었다. 전쟁 후 산업화가 진전되는 시기엔 수많은 선원과 노동자들이 뭍에서 섬으로, 섬에서 뭍으로 일거리를 찾아 혹은 일터로 가기 위해 하루 수십 번씩 왕래를 반복한 눈물의 다리이기도 했다.

영도 다리는 존폐 논란을 거친 끝에 지금 복원의 길을 밟고 있다. 영도 다리의 명성이 자자했을 그 시절 부산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 시절로 타임머신처럼 날아가는 길이 있다. 노래라는 마법을 타면 된다. 영도와 영도 다리는 1950~1960년대 유행가가 가장 애창했던 소재였다. 유행가, 곧 대중가요 속에는 그 시대의 풍경과 민중의 감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법이다. 기억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는 영도 다리를 기억하기 위해 대중가요를 통해 그 시대의 속살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영도 다리가 지닌 사연들,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근현대 부산의 풍경화가 그려질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대중가요가 지니는 의미와 가치도 드러날 것이다.

[부산의 축소판, 영도]

영도 다리를 말하려면 먼저 영도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영도는 따뜻하고 먹을거리가 많아서 이미 신석기 시대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동삼동 패총 등에 남아 있다. 신라 시대부터 조선조 중기까지 나라에서 국마장(國馬場)을 경영할 만큼 명마 사육의 최적지였던 영도의 원래 이름은 ‘절영도(絶影島)’였다. 하루에 천 리를 달리는 명마가 빨리 달리면 그림자가 못 따라올 정도라는 의미로 끊을 절(絶), 그림자 영(影) 자를 붙인 것이다. 영도는 임진왜란 후 섬을 비우는 공도책(空島策)에 따라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절도(無人絶島)가 되었고, 1981년에야 절영도진(絶影島陣)이라는 첨사영(僉使營)이 들어섰다.

초라한 갯가에 지나지 않던 영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개항의 파고에 휩싸인 뒤 일본에게 군사적 요충지로 삼켜진다. 영도에서 길러진 군마가 만주 등지로 가서 침략 전쟁에 동원되기도 했다. 그렇게 영도는 개화기 한국에서 수탈과 근대 문명의 1번지라는 이중적인 이름을 숙명처럼 껴안았다.

그러나 이를 뒤집어 보면 영도가 부산 내륙을 방위한 병풍이었다는 의미가 된다. 영도가 없었다면 부산은 태평양 거친 물살과 매서운 해풍에 고스란히 노출됐을 것이다. 부산의 시인 최영철의 시선을 빌리면 “영도는 부산이 받을 풍파를 먼저 받아 삭혀낸 곳”이고, “부산이 감당해야 할 시련의 많은 부분을 혼자 짊어져 온 곳”이다. 그리하여, 부산의 곳곳을 소설로 쓰는 조갑상[경성대학교 교수]의 말대로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영도야말로 부산 역사의 축소판이다.”

[수탈과 이산의 아픔 간직한 영도 다리]

개항 이래 일본인들의 영도 이주는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1930년 영도의 인구가 5만여 명에 이르자 나룻배와 도선으로는 뭍과 섬 사이의 늘어나는 왕래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게 된다. 일본으로서는 일본인 어부들이 어항을 쉽게 오가는 것은 물론 군수 물자도 신속히 실어 나를 수 있는 새로운 통로가 절실했다. 물론 그 이면에 버티고 선 것은 영도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요새로 만들어 가고 있던 일제의 군국주의적 야심이다. 이미 봉래산과 영선동에 군마 주둔지가 있었고, 청학동에 곡사포 기지가 있었으며, 대륙으로 향하는 관동군들의 쉼터가 태종산에 있었다.

영도 다리는 1932년 4월 착공되어, 1934년 11월 준공된다. 길이 214m, 너비 18.3m, 높이 7.2m로 부산의 남항과 영도를 연결하는 이 다리는 국내 최초의 도개교다. 도개교로 만들어진 데에는 곡절이 있었다. 다리를 놓자니 큰 배들이 통행에 제약을 받을 것이고, 영도를 돌아 북항으로 입항한다면 막대한 비용을 떠안을 수밖에 없는 해운업계의 거센 반발이 불 보듯 뻔했다. 그래서 해안을 메운 뒤 제방을 만드는 방안, ‘지하 터널’을 놓는 방안 등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했다. 결국 교각 사이 상판 한 부분을 전동기로 들어 올려 선박 출입을 가능하게 하자는 기발한 제안이 대안으로 떠올랐고, 영도 다리에 적용되었다.

준공되던 날, 영도 다리 앞은 하늘로 솟구친다는 신기한 다리를 보려고 찾아온 구경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뭍 쪽 다리 일부분이 들리자 사람들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한다. 부산의 향토 사학자이자 민속학자인 주경업 부산민학회장은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나 이런 저런 자료를 보면 중구 자갈치 다리목에 당시로서는 상상도 힘든 자그마치 6만 명가량의 인파가 김해, 양산, 밀양 등지에서 몰려들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며 “그 당시 부산 인구가 16만 명, 영도 인구가 5만 명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6만 인파는 그야말로 엄청난 것이었다.”고 전했다. 마법의 다리는 하루 2~7 차례 80도까지 들어 올렸고, 다리 위로는 전찻길까지 놓여 평소에는 전차가 오고 갔다. 이후 영도 다리는 그것을 구경하는 일이 사람들의 일생의 소원일 만큼 부산의 대표적인 명물로 자리 잡는다.

그러나 영도 다리의 화려함 이면에는 일제에 강점당한 식민지 조선의 아픔이 서려 있다. 다리 건설에 동원된 조선인 노무자들은 공사 시작부터 수난을 겪었다. 호안 매립 공사를 하면서 산이 무너져 내려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다리 공사 중에도 희생자들이 속출했다. 이후 일제의 수탈을 견디다 못한 숱한 식민지 조선인들은 이 다리 아래로 스스로 몸을 던지기도 했다.

부산의 명물 영도 다리는 6·25 전쟁 때 ‘눈물의 명소’가 되었다. 그 난간은 피란민들의 손때로 반들거렸고, 숱한 눈물방울들이 말라붙어 얼룩이 졌다. 전쟁 통에 헤어진 사람들이 반드시 만나자고 눈물로 약속한 공간,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찾았던 곳이 영도 다리였기 때문이다. 피란민들은 포화를 뚫고 살아남아 땅 끝 부산에서 가족․친지들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고대하며 몸부림쳤다.

특히 1․4 후퇴 때 흥남 부두에서 LST[상륙 작전 함정]를 타고 혈혈단신 월남한 ‘함경도 아바이’들의 아픔은 모진 것이었다. 영도 청학동남부민동영주동을 비롯한 산비탈에 판잣집 촌을 이루었던 이들은 매일 틈만 나면 일가붙이를 찾아 영도 다리를 헤매고 다녔다. 다리 아래에는 몇 천 명이나 모여 사는 교하촌(橋下村)이 있었는데,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린 고(故) 장기려(張起呂)[1911~1995] 박사가 처음 천막 병원을 연 곳도 영도 다리 밑이었다. 장 박사는 야전 침대 하나 놓고 숙식을 하면서 복음병원을 찾은 환자들을 돌보았다.

“우리 딸 찾을 수 있는교? 어디 가면 찾을 수 있을까예?” 영도 다리 아래 점집 골목이 생겨나 크게 붐빈 것도 그 무렵이었다. 전쟁 통에 헤어진 가족들의 생사를 묻는 피란민들의 애타는 그리움이 점집을 번창시켰다. 그러다 다리 난간 아래로 아예 삶을 버린 사람도 숱하게 많았다. 산업화 시대에는 도시의 화려한 불빛을 좇아 몰래 집 나간 자녀를 찾으려고 부모들이 영도 다리 아래 점집 골목을 찾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다. 날품팔이꾼으로 지친 일용 노동자들, 기름내 나는 작업복을 두른 조선소 직공들, 학창 시절에 영도로 통학했던 학생들까지 영도 다리에는 수없이 많은 삶의 기억들이 새겨져 있다.

이별과 눈물의 공간, 악명 높은 자살 장소였던 영도 다리가 천진한 아이들에게는 신 나는 물놀이 터였다는 것, 그것은 생의 아이러니다. 어린 시절을 보수동에서 보냈다는 김열규[서강대하교 명예 교수]는 회상한다. “팬티 하나만 걸치고 건너편 영도까지 헤엄쳐 되돌아오곤 했다. 기선들이 내왕하는 항로 사이를 비집고 다녔으니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친구들과 10m나 되는 다리 위로 올라가 뛰어내리는 내기도 했다.”

1966년 영도 다리는 늘어나는 교통량과 상수도관 설치 문제 때문에 마침내 도개 기능을 멈춘다. 개통 당시 공식적인 이름이 부산 대교였던 영도 다리는 1980년 그 옆에 새로운 다리가 건설되자 거기에 자신의 이름을 내어 주고 영도 대교라는 이름을 얻는다. 그러나 이미 사람들의 입에 굳은 말은 “영도 다리”다. 현재 영도 다리는 존폐 논란 끝에 부산광역시 지정 기념물로 보존하기로 최종 결정이 나면서 복원 공사 중이다. 도로 폭이 4차선에서 6차선으로 늘어나고, 멈췄던 도개 기능까지 되찾아 부산의 새로운 명소로 재탄생하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흥남 부두의 금순이는 누구였을까]

1917년, 고래 등보다 수백 배는 넓은 커다란 선박 한 척이 절영도 대풍포 앞바다에 닻을 내렸다. 미국 최대 석유 회사 ‘스탠다드 오일’의 ‘서양 기름선[유조선]’이었다. 기름을 다 내리고 출항하는 날 새벽, 두 청년이 몰래 배 안에 숨어들어 밀항을 기도하다 발각되는데, 그 두 청년 중 한 사람의 이름이 현명건이다. 바로 「굳세어라 금순아」로 유명한 가수 현인(玄仁)[1919~2002, 본명 현동주]의 아버지다. 이후 아버지 현명건이 스탠다드 오일의 사무원으로 취직하면서 현인은 영도와 뗄 수 없는 인연을 맺게 된다.

영도 다리의 영도 쪽 끝 부분에 ‘현인 노래비 굳세어라 금순아’가 ‘도개교 영도 대교 기념비’와 마주 보며 서 있다. 현인은 영도와 영도 다리, 영도 노래를 이야기할 때 반드시 살펴보아야 할 ‘1세대 가수’다.

1919년 영도 영선동에서 태어나 일제 강점기 때 노래 활동을 시작한 현인은 「굳세어라 금순아」를 비롯해 「신라의 달밤」, 「비 내리는 고모령」, 「전우야 잘 자라」 등 1950~1960년대 서민의 애환과 향수를 달래 준 가락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이다. 특히 시원하게 내지르고 부르르 떠는 독특한 바이브레이션과 스타카토 창법은 큰 인기를 끌었다. “「신라의 달밤」의 인기가 어찌나 높았던지 6·25 전쟁 이후 포로 교환 때 이 노래를 제대로 부르면 이남 사람, 못 부르면 이북 사람으로 구별했던 일화는 유명했다.”는 게 미망인인 김미정 여사의 증언이다.

그러나 그 숱한 현인의 히트곡 중에서도 6·25 전쟁 당시의 부산과 영도 다리를 소재 삼아 우리나라의 국민가요로 크게 불렸던 노래가 있었으니 바로 「굳세어라 금순아」[강사랑 작곡, 박시춘 작곡]이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 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 이후 나 홀로 왔다.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 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 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철의 장막 모진 설움 받고서 살아를 간들.

천지간의 너와 난데 변함 있으랴

금순아 굳세어다오 북진 통일 그날이 되면.

손을 잡고 울어보자 얼싸안고 춤도 추어보자.

눈보라가 치는 흥남 부두에 사랑하는 여인[동생?]을 두고 와 영도 다리 난간에 기대 초승달을 바라보며 그리움에 목이 멘 남성이 노래의 주인공이다. 구체적인 사실감과 가사가 지닌 현실감이 마치 소설이나 극영화를 보는 것처럼 눈앞에 생생하다. 1․4 후퇴 때 함경도 지방 사람들은 육로가 아닌 배로 남하했다. 한 해 중 가장 추운 양력 1, 2월 바닷바람에다 눈보라까지 몰아쳤으니 부둣가에서 며칠 밤씩 배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부지기수로 얼어 죽었고, 도착한 배에 먼저 오르려는 처절한 몸부림은 그야말로 생지옥의 아비규환을 이루었다. 그런 이야기가 「굳세어라 금순아」 속에 고스란히 다 담겨 있는 것이다. 노래의 주인공은 함께 피란길에 오른 금순이를 잃어버리고 결국 찾지 못한 모양이다. 우여곡절 끝에 국제 시장에서 장사하며 생계를 잇고 있지만 끝내 금순이의 생사를 알지 못한다. 여자의 몸으로 전쟁 통에 홀로 된 금순이의 고생은 오죽할까 하는 생각에 찢어지는 남자의 심정이 노래를 통해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굳세어라 금순아」는 작사가 강사랑이 대구에서 피란 생활을 하던 중 피란민들의 초라하고 지친 행색을 바라보다 문득 착상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전통 가요 수집가이자 대중음악 연구가인 김종욱은 “노랫말의 감흥을 얻은 박시춘이 곧바로 작곡해 대구에 있던 오리엔트레코드사 2층에서 자정이 넘은 시간, 군용 담요로 창문을 겹겹이 가린 뒤 녹음했다는 눈물겨운 후일담이 있다.”고 전했다.

그런데 금순이는 원래 경상도 아가씨라는 흥미로운 이야기도 있다. 1950년 이전 해방 공간에서는 연극에 가요를 삽입시킨 가요극이 성행했는데, 그 주요 배경이 영도 다리와 40계단이었고, 여주인공이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땋은 경상도 아가씨 금순이였다는 것이다. 박명규[한국해양대학교 교수]는 2001년 『해기 회보』에 실은 「부산항 시와 영도 대교 관련 해양 대중가요의 역사적 고찰」이라는 논문에서 “당시 극영화나 공연물에 나타난 각종 기록을 살펴보면 금순이는 영도에서 태어난 어부의 딸로 영도 남항동 영도 시장에서 생선 장사를 했다는 설과 영선동 쌀가게 주인이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며 ‘금순이라는 이름은 실존 인물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고 쓰고 있다. 그의 말을 따르면 1950년대 초에는 선박의 이름을 지명이나 명산의 이름에서 따오거나 선주의 이름 혹은 집안사람의 이름을 가져다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실제로 고기잡이 어선인 ‘금순호’라는 배의 이름이 당시의 선명록에서 확인된다는 것이다. 그런 만큼 금순은 실제로 살았던 사람으로 추정된다.

서울 출신의 부산 가수 차은희는 1961년 「경상도 아가씨의 순정」을 발표하는데, 그 노랫말에 영도 다리를 배경으로 한 경상도 아가씨의 사연과 구애가 ‘금순이’라는 주인공의 이름으로 흘러나온다. “선생님 날 사랑하셔요 정말로 사랑하나요/ 장부의 말씀이라 금순이는 믿겠어요/ 선생님 선생님 몸 성히 잘 가셔요/ 경상도 금순이는 영도 다리에서 기다립니다.” ‘금순’이란 이름이 제목에 들어간 노래는 「온천 에레지」로 유명한 부산 출신의 가수 변임복이 1955년에 이미 「금순의 가는 길」이라는 곡으로 부른 바 있다. 어쨌든 금순이와 관련된 노래는 이후 「경상도 아줌마」, 「자갈치 아줌마」, 「왈순 아줌마」 등 부산의 또 다른 노래로 가사를 바꾸며 변주되는 모습을 보인다. 결국, 금순은 새벽 일찍 집을 나서 고기를 떼다 팔아 자식을 공부시켰던 우리네 이웃의 ‘아지매’들,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고 모진 삶을 일구어 나가야 했던 우리네 ‘어머니’들을 모두 아우르는 이름이 아니었을까. 그것은 1950~1960년대 전쟁으로 폐허가 된 부산을 억척스럽게 일궈온 부산 여성들의 또 다른 이름이었던 것이다.

[영도 다리 품은 그 시절 그 노래]

우리나라 대중음악은 19세기 말 서양 음악이 들어오면서 시작되었다. 서양 민요나 일본 창가를 번안하는 식이었다가 1920년대 후반 레코드 산업이 본격화하면서 창작 가요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최초의 창작 가요는 1927년 김서정이 작곡한 「낙화유수」이며, 이후 「황성옛터」, 「타향살이」 등 명곡이 나와 인기를 끌었다. 민요풍 가락에 서양 악기로 반주를 붙인 신민요도 유행했다. 작곡가 고 박시춘은 국내 처음으로 대중가요를 집대성한 세광출판사의 『한국 가요 전집』[1980년] 서두에 “신식 노래와 창가가 1920년대 이르러 대중가요를 낳았다. 처음에는 ‘유행 소곡’이었다가 1920년대 후반에 ‘유행가’로 통했다.”고 적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1928년 김용환의 목소리로 발표된 「낙동강 칠백 리」[왕평 작사, 조자룡 작곡]가 부산의 지명을 노랫말에 지닌 첫 대중가요로 보인다.

부산을 노래한 가요 중 가장 많이 언급된 부산의 지명은 부산항이다. 1939년 남인수가 부른 「울며 헤진 부산항」[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곡]은 일제 강점기 관부 연락선에 실려 징용을 떠나는 식민지 조선인의 슬픈 심사를 담아내고 있다. “울며 헤진 부산항을 돌아다보는 연락선 난간머리 흘러온 달빛/ 이별만은 어렵더라 이별만은 슬프더라 더구나 정들인 사람끼리.”라고 불린 이후 부산항은 이별과 재회의 대표적인 공간으로서 대중가요의 단골 소재로 내내 불려 나온다.

19세기 개항 이후 우리 민족은 세 가지의 커다란 헤어짐, 곧 ‘이산(離散)’을 겪는다. 첫째는 일제 강점기 생존을 위해 고향과 가족을 떠나 간도․연해주 등지의 해외로 흩어졌던 눈물의 역사이다. 1925년 김동진 작사의 「떠도는 신세」, 김용호 작사의 「이역에 우는 사나이」, 최초의 본격 대중음악 가수였던 채규엽의 「방랑자의 노래」 등이 이런 역사적 이산을 배경으로 한다. 둘째는 6·25 전쟁으로 인한 이산이다. 한반도 민중의 운명을 맹렬히 뒤섞어 놓은 전쟁은 과거에는 결코 만날 일 없었던 함경도 남자와 경상도 아가씨가 영도 다리에서 운명적인 인연을 맺게 하였다. 셋째는 1960~1970년대 산업화 과정에서 만들어진 이산 희생자들로서, 정권의 도시 이주 정책에 따라 농촌을 떠나 대도시로 흘러든 우리 누이와 형들이다. 이들은 공장 노동자로, 술집 여급으로, 차장으로, 식모로 떠돌았다.

부산항이 우리 민족의 세 가지 이산 가운데 일제 강점기 때부터 이미 이별의 대표적인 공간이었다면, 영도 다리는 둘째인 6·25 전쟁과 셋째인 산업화 과정에서의 이산과 관련이 깊다. 영도 다리는 피란민뿐만 아니라 날품팔이를 위해 한숨을 토하며 부두로 나서던 노동자들, 아이를 등에 업고 팔 것을 머리에 인 채 골목을 누빈 아낙네, 매정하게 돌아선 연인의 이름을 부르며 죽느냐 사느냐를 고민하던 청춘들, 차비 몇 푼 아껴보려고 하염없이 걷던 학생들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사람의 무수한 사연이 간직된 곳이다. 철제 난간과 교각에는 가슴 속에서 터져 나온 말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덧칠되고 덧칠된 다리를 칠판 삼아 쓴 말들은 하나같이 꾸밈없고 간절한 것이었다.

최영철 시인의 “영도 다리는 낡고 초라한 시멘트 구조물이 아니라 성장기의 숱한 기억들을 환기시키는 하나의 생명체다. 작고 볼품없어 보이는 다리 하나가 그런 중량을 가지는 것은 그 다리 속에 한 사람이 아닌 수십 수백 수천만의 추억이 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곡진하게 다가온다.

한국에 불어 닥친 근현대의 매서운 해풍을 온몸으로 받아 안았던 영도 다리의 숨은 사연들이 이렇게 많은데 영도 다리를 소재로 한 대중가요가 「굳세어라 금순아」 하나밖에 없을 리 없다. 전 국민적으로 히트한 「굳세어라 금순아」에 가려졌을 뿐이지 영도 다리를 품에 안은 가요들은 얼마든지 많이 있다. 부산의 대중음악 연구가인 김종욱이 소장하고 있는 음반 및 음원 자료를 보면 영도 다리가 남긴 1950~1960년대 그 시절 그 노래는 30여 곡을 훌쩍 뛰어넘는다. 아예 제목에 영도 다리가 들어 있는 노래만도 10여 곡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해방과 6·25 전쟁을 겪으면서 귀환 동포와 피란민들의 고달픔을 읊은 대중가요들이 특별한 인기를 끈 것은 당연하다. 영도 다리는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개인의 이지러진 삶을 노래로 연결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매개체였다. 아니 그보다는 짙은 탄식과 무거운 한숨이 영도 다리 앞에서 저절로 흘러나와 가락이 되고 노래로 터졌다고 말하는 편이 옳다.

흥남부두 울며 찾던 눈보라 치던 그날 밤 내 자식 내 아내 잃고 나만 외로이

한이 맺혀 설움에 맺혀 남한 땅에 왔건만 부산항구 갈매기의 노래조차 슬프고나

영도다리 난간에서 누구를 찾어 보나.

동아극장 그림 같은 피눈물 젖은 고향 꿈 내 동리 물방아 도는 마을 언덕에

양 떼 몰며 송아지 몰며 버들피리 불었소 농토까지 빼앗기고 이천리길 배를 곯고

남포동을 헤매 도는 이 밤도 비가 온다.

여수 통영 님을 싣고 떠나만 가는 똑딱선 내 가족 내 자식 싣고 내 아내 싣고

내 품에다 내 가슴에다 반겨 주게 하련만 하루 종일 부두 노동 땀방울을 흘리면서

사십 계단 판잣집에 오늘도 우는구려.

1953년 손인호가 부른 「함경도 사나이」[손로원 작사, 나화랑 작곡]의 절절한 노랫말이다. 전쟁 통에 가족 잃고 홀로 된 실향민의 애달픈 심사가 이 노래에 다 들어 있다. 매년 6월만 되면 지금도 실향민들은 여전한 아픔에 젖어 영도 다리 난간을 붙잡는다. ‘흥남 부두’, ‘부산 항구’, ‘똑딱선’, ‘부두 노동’, ‘40계단 판잣집’ 같은 노랫말에 아픈 개인사와 힘겹고 고된 일상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굳이 이북 출신이 아니라 해도 전쟁을 겪은 한국인으로서 이런 실향의 상처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6·25 전쟁의 포성이 멈춘 지 꼭 60년, 그러니까 그때 태어난 사람이 어느덧 회갑을 훌쩍 넘길 만큼 세월은 많이 흘렀다. 그러나 옛 가요는 애잔한 선율과 슬픈 정서로 이후 세대들에게도 60년 전의 아픔을 고스란히 전해 준다. 대중가요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힘이다. 노래는 그렇게 사람들에게 따뜻한 위로가 된다.

1·4 후퇴 때 북에서 내려온 실향민들은 살아남기 위해 국제 시장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날마다 부두로 나가 날품을 팔아야 살 수 있었다.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음식 찌꺼기를 모아 끓인 ‘꿀꿀이죽’으로 연명하는 절박한 인생들이 헤매고 다닌 곳이 영도 다리와 남포동40계단 주변이다. 뒤집어서 말하면, 부산이 이들을 품에 안았다고 볼 수 있다. 부산은 남루하나마 생존의 공간을 제공했고, 여기서 고통을 이겨낸 삶은 이후 부산이 번성하는 토대가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실향민들은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이북 출신들은 그대로 눌러앉은 경우가 많았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 손인호 역시 압록강 변 수풍댐 근처의 평안북도 평성이 고향이다. 우여곡절 끝에 남하하여 터전을 잡았던 까닭에 누구보다 노래에 깃든 애잔한 정서를 잘 담아냈다. “한 많은 피난살이 설움도 많아 그래도 잊지 못할 판잣집이여”라는 대목에서 절규하는 남인수의 가요 「이별의 부산 정거장」과 함께 「함경도 사나이」를 당시의 사연을 담은 가장 뛰어난 절창으로 꼽는 이동순[영남대학교 교수]은 “흘러간 옛 노래의 가사는 시보다 한층 아름답고 소중한 가치를 담아낼 때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 민족사의 온갖 사연과 생활사를 감동적으로 담아낸 역사적 자료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십 계단 층층대에 앉아 우는 나그네 울지 말고 속 시원히 말 좀 하셔요

피난살이 처량스레 동정하는 판잣집에 경상도 아가씨가 애처로워 묻는구나

그래도 대답 없이 슬피 우는 이북 고향 언제 가려나.

고향길이 틀 때까지 국제시장 거리에 담배장사 하더라도 살아보셔요

정이 들면 부산항도 내가 살던 정든 산천 경상도 아가씨가 두 손목을 잡는구나

그래도 눈물만이 흘러 젖는 이북 고향 언제 가려나.

영도다리 난간 위에 조각달이 뜨거든 안타까운 고향 얘기 들려주셔요

복사꽃이 피던 날 밤 옷소매를 부여잡는 경상도 아가씨의 그 순정이 그립구나

그래도 뼈에 맺힌 내 고향 이북 고향 언제 가려나.

박재홍이 부른 「경상도 아가씨」[손로원 작사, 이재호 작곡]는 「함경도 사나이」의 짝패와 같은 노래다. 전쟁 때문에 민족의 대이동이 일어났고, 그것이 사람들의 삶의 공간을 크게 휘저어 섞어 놓았다는 것은 앞서 말한 바 있다. 1953년에 발표된 이 노래 역시 부산에 피난 온 이북 출신의 피란민이 판잣집 생활을 하며 40계단에 앉아 우는 애달픈 생활상을 손에 잡힐 듯 그려 내고 있다. 그런데 경상도 아가씨는 이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제 일처럼 아파하며 상처를 다독거린다. “영도 다리 난간 위에 조각달이 뜨거든 안타까운 고향 얘기 들려주셔요.”라며 위로하고 “정이 들면 부산항도 내가 살던 정든 산천이라.”며 손목을 잡아 주기까지 한다. 타향살이의 설움을 달래 주는 마음이 살갑기 그지없다. 이런 부산의 인심은 그저 마음의 겉치레가 아니라 행동을 수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름답다. 여기서 경상도 아가씨는 굳이 결혼 전의 처녀를 가리키는 것으로 한정시킬 필요는 없겠다. 오히려 정이 넘치고 남을 생각할 줄 아는 부산 사람 모두의 심성을 이르는 표현으로 이해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품어준 따뜻한 위로와 격려에도 그리운 고향 생각에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남자의 독백 같은 후렴구가 가슴을 저미게 한다.

그런데 「경상도 아가씨」는 다소 경쾌한 폴카 리듬이다. 작곡가는 고단한 현실을 이겨 내고 희망의 의지를 담아내려고 했다. “이 노래와 비슷한 시기에 나온 유행가들의 곡조가 노랫말이나 현실과는 반대로 대체로 밝은 색조를 띠고 있는 것도 비슷한 이유로 보인다.”는 것이 이동순 교수의 분석이다. 영도 다리와 함께 노래의 무대가 되었던 중앙동의 40계단은 당시 피란민들이 주로 모여 살았던 영주동동광동 판자촌으로 오르는 산동네[달동네]의 입구였지만, 무엇보다 부산항의 전경이 잘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은 계단 모서리에 앉아 항구의 불빛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경상도 아가씨」를 듣고 향수를 달랬다.

「경상도 아가씨」는 이북에서 내려온 속칭 ‘38 따라지’들이 모여 부산에서 만든 미도파 레코드에서 나왔다. 물자가 귀했던 이 시절은 엿장수가 모아온 고물판을 재생하는 수공업 수준의 것이었다. 지난 2007년 40계단 문화관 특별전 ‘6·25 전쟁과 대중가요: 기록 & 증언’에서 글을 맡았던 박성서[대중음악 평론가]는 “무딘 바늘에 SP 음반이 몇 번 닳고 나면 원래 취입되어 있던 노래가 튀어나와 합창을 이룰 지경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한 잔의 술이나마 미련 없이 마셔라 정처 없는 타관살이 간 곳마다 정을 두고,

한사코 버린 고향 하동포구 섬진강을 손바닥에 그려보며 술 취정이 웬 말이냐.

부산을 떠나볼까 제주도를 가볼까 가도 그만 와도 그만 망설이는 단봇짐은,

제트기 껄껄대는 영도다리 난간에서 사주팔자 걸어놓고 손금점이 웬 말이냐.

1955년 박재홍이 부른 「손금 보는 내력」[야인초 작사, 한복남 작곡]에는 영도 다리 밑 점집에 관련된 내용이 나와 흥미롭다. “정처 없는 타관살이 간 곳마다 정을 두고”라든지 “부산을 떠나볼까 제주도를 가볼까”라는 노랫말에서 실향민이 노래의 주인공임을 알 수 있다. 피란민들이 헤어진 가족들의 생사나마 짐작해 보기 위해 자주 찾은 점집들은 영도 다리 아래에 큰 무리를 이루며 번창했다. 애통한 마음이 점집들의 성업을 도왔다는 사실은 죽음이 삶을 보듬었다는 점에서 참으로 역설적이다. 주경업[부산민학회 회장]은 “영도 다리 아래 점집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성행해 한 때 70여 곳을 헤아릴 만큼 많았다.”며 “그러나 사람들의 간절함을 노려 한몫 챙기려는 엉터리 점쟁이들도 많았다.”고 진술했다. 남포동에서 영도 다리를 건너기 직전 오른쪽 계단을 끼고 내려오면 부산 앞바다와 마주하는 이른바 ‘점바치 골목’이 아직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작고 초라한 2~3곳만 명맥을 유지하는 영락한 수준이다. 부산시청이 연산동으로 옮겨 가고, 영도 다리 복원 공사가 추진되면서 점집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찾아갈 곳은 못 되더라 내 고향 버리고 떠난 고향이기에

수박등 흐려진 선창가 전봇대에 기대서서 울적에

똑딱선 프로펠러 소리가 이 밤도 처량하게 들린다

물 위에 복사꽃 그림자같이 내 고향에 꿈이 어린다.

찾아갈 곳은 못 되더라 내 고향 첫사랑 버린 고향이기에

초생달 외로이 떠 있는 영도다리 난간 잡고 울적에

술 취한 마도로스 담뱃불 연기가 내 가슴에 날린다

연분홍 비단실 꽃구름 같이 내 고향에 꿈이 퍼진다.

1954년 남인수가 맑은 미성으로 부른 「고향의 그림자」[손로원 작사, 박시춘 작곡]는 이별의 공간인 부산항과 영도 다리를 소재로 삶과 이별, 고독, 그리움을 짙게 드리운 노래다. “초생달 외로이 떠 있는 영도 다리 난간 잡고 울적에/ 술 취한 마도로스 담뱃불 연기가 내 가슴에 날린다.”는 가사는 여러 가지 의미로 읽힌다. 그것은 전쟁으로 인해 이북에 가족을 남기고 온 실향민일 수도 있고, 부산을 거주지로 둔 마도로스가 곳곳을 떠돌며 살아야 하는 이동의 삶을 아파하는 것일 수도 있고, 하늘에 별이 쏟아져 내리는 부산항 밤바다와 영도 다리에 얽힌 첫사랑의 아련한 추억일 수도 있다. 어쩌면 부산 항구의 수많은 ‘금순이’는 마도로스를 떠나보내며 눈물을 흘렸을지 모르겠다. 그때 「고향의 그림자」는 아쉬움과 미련의 심사를 담아 곧잘 불리지 않았을까.

김종욱[대중음악 연구가]은 “영도 다리가 가사에 한 줄 들어가 있는 노래보다 영도 다리가 제목에 들어 있는 노래가 진짜 영도 다리 노래가 아니겠는가. 그런 노래가 온전히 영도 다리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 말에 공감한다면, 우리는 윤일로가 부른 「추억의 영도 다리」[1958]를 기억해야 한다. 제목에 영도 다리가 들어가는 가요 중 가장 히트한 곡인 「추억의 영도 다리」에는 영도 다리 난간을 부여잡고 흐느끼는 한 사나이의 독백으로 가득 차 있다. “울었네 소리쳤네 몸부림쳤네/ 안개 낀 부산항구 옛 추억만 새롭구나/ 몰아치는 바람결에 발길이 가로막혀/ 영도 다리 난간 잡고 나는 울었네.” 이별의 공간 부산항과 영도 다리에서 지난날을 잊지 못한 남자의 탄식과 눈물이 서럽게 흩날린다.

하지만 영도 다리가 마냥 슬픈 이별과 서러운 그리움의 소재로만 불렸던 것은 아니다. 부산 항구를 아시아로 나아가는 관문으로 묘사해 인기를 끌었던 방운아의 노래 「부산 행진곡」[1956]은 2절 가사에서 “우뚝 선 영도 다리 갈매기들의 놀이터”라며 영도 다리를 재미있고 긍정적인 시각으로 그려 낸다. 김상국은 1965년 경상도 지방에 전승되어 온 민요 「쾌지나 칭칭 나네」를 리메이크한 노래로 흥미를 끌었는데, 부산 사람의 귀를 크게 사로잡기도 했다. “부산땅으로 가봅시데이 영도섬 다리가 끄덕끄덕 하루에도 수십 번 끄덕끄덕”이라는 가사가 영도 다리의 도개 기능을 성적 익살로 능청스럽게 버무려 웃음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들어 올려지는 다리를 사랑에 비유한 노래는 그 이전에도 있었다. “영도 다리 끊어질 때 사랑은 끊어지고 영도 다리 내려올 때 사랑은 간 곳 없네.”라고 노래한 박재홍의 「영도 다리 비가」[1960]가 그것이다.

영도 다리의 도개 기능이 멈추자 가수들은 그 아쉬움도 노래로 표현했다. 이성남이 「잠들은 영도 다리」[1967]에서 “기나긴 세월 따라 오르내린 서른 해 솟아오른 내 모습도 다시 볼 길 없구나/ 서글픈 인생살이 난간 잡고 달래보던 전설을 남겨놓고 잠들은 영도 다리”라고 노래했고, 여운은 「들지 않는 영도 다리」[1967]를 통해 “슬픈 쌍고동이 오륙도로 퍼져갈 때 영도섬 아가씨가 갈 길을 막아 놓고/ 못간다고 못간다고 매달리던 영도 다리 그리워 내가 왔건만 들지 않는 영도 다리 가로등만 깜박이네.”라고 읊었다.

위에 언급한 노래들 외에도 제목에 영도 다리가 있는 노래로는 「끊어진 영도 다리」[박재홍, 1958], 「눈물의 영도 다리」[백야성, 1961], 「울고 넘는 영도 다리」[시민철, 1961], 「눈물의 영도 다리」[안정애, 1963], 「이별의 영도 다리」[김희수, 1965], 「영도 다리」[명국환, 1965], 「이별의 영도 다리」[이상열, 1968] 등을 꼽을 수 있고, 가사에 영도 다리를 품고 있는 노래로는 「고달픈 청춘」[남백송, 1956], 「이름 없는 조각배」[박재홍, 1956], 「여수의 부산항구」[손인호, 1957], 「이별의 부산항」[손인호, 1960], 「부산은 내 고향」[손인호, 1965], 「부산항에 왔습니다」[윤호, 1986] 등이 더 있다. 영화 「굳세어라 금순아」의 주제가인 「금순의 노래」[황금심, 1962]와 영화 「눈물의 영도 다리」에 나온 동명의 주제가[안정애, 1965]처럼 영도 다리를 소재로 한 영화의 삽입곡들도 인기를 모았다.

이후에도 영도 다리와 관련된 노래가 간혹 발표되었지만 도개 기능이 멈춘 다음에는 더는 그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다.

[한국 현대사의 거울, 노래로 불려진 영도 다리]

사람들이 유행가를 찾는 것은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래에 공감한 사람들이 쉽게 따라 부르니까 유행가다. 리듬에 실린 가사는 그냥 읽는 것보다 오래 기억되고 향유되기 때문에 전파력도 강하다. 대중가요는 그렇게 서민들의 입으로 가슴으로 흘러왔다.

대중가요는 개인의 구체적인 체험을 노래하지만 시대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가요가 삶을 비추는 거울이면서 시대를 그리는 풍경화가 되는 것은 그런 이유다. 앞서 살펴본 대로 영도 다리에 얽힌 대중가요들이 더도 덜도 없는 증거들이다. 영도 다리가 그렇듯, 영도 다리를 노래한 유행가 역시 시대의 아픔과 절망을 희망으로 연결하는 연결 고리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어디 영도 다리뿐이랴. 부산의 곳곳을 노래한 대표적인 노래들은 얼마든지 많다. 그것들 역시 저마다 그 시대를 담고 있다.

부산은 임시 수도였던 피란 시절부터 한국 대중문화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가요도 마찬가지여서 도미도, 미도파 등 메이저 음반사가 부산에서 활동을 시작하여 가요계를 양분했다. 이후 부산은 가요 인맥이라든지 음반 판매율의 경우 전국적인 장악력을 가졌다. 부산·경상남도 지방의 반응을 먼저 살펴본 뒤 전국으로 확대할 정도로 공연과 쇼 흥행의 승부처였다는 것이다. 부산․경상남도 인근까지 확대하면 가요사, 가수, 작곡가 등 관련 인물들의 범위는 만만치 않아서 한국 가요사의 밑그림이 그려질 정도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를 너무나 쉽게 잊는다. 한때 우리 부산을 구성했던 것들은 불과 반세기도 지나지 않았는데도 희미하게 잊히고 있다. 기록을 찾고 보존하는 노력도 소홀하다. 그렇다면 역사의 침묵 속에 묻힌 부산을 찾아내는 가장 빠른 길은 무엇일까. 그건 보통 사람들이 겪었던 일상사의 숨결들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서민들의 감성에 직접 호소하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대중문화, 나아가 대중가요를 찾아내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작업이다.

부산의 노래들은 여전히 발굴을 기다리는 숨은 사실들이 적지 않다. 물론 부산의 가요사적 자료는 많은 부분 소실되고 사라졌다. 영도 다리뿐만 아니라 부산의 곳곳을 노래했던 대중가요들을 더 늦기 전에 발굴·수집하고, 정리하는 일이 급하다. 나아가 부산의 지명, 공간을 노래한 부산 가요사의 정립, 앞으로 부산의 역사․문화 등의 일부분으로서 대중가요 자료를 데이터베이스로 갈무리하는 작업, 그리고 이를 널리 알리고 전통 가요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돕는 대중적 홍보도 뒤따라야 한다.

대중 가수 1세대로는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작곡가 손석우는 말한다. “아무리 아름다운 소리라 해도 울렸다 하면 다음 순간 흘러가 버리고 사라지고 만다. 오직 우리의 기억과 기록만이 그 가치를 유지, 존속시킬 수 있다.” 그렇다. 영도 다리가 다시 들려야 하는 것처럼, 그것을 노래한 노래 역시 다시 들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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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글을 쓰고 이곳에 옮겨 적는 것은 자료를 보관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책으로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앞으로 많은 시간과 숙성을 거쳐야만 하는 데 그 진가가 발휘되기 위해서 필요한 자료로 첨부될 내용이라고 할까? 그렇다면 이 모든 내용이 언제 어느 때 충분한 소재로서 활용될 수 있을까? 그것은 문학적인 고취하 충분히 무르익어야만 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