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딘소장

2010.10.28 23:20

文學 조회 수:2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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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jeju.eduhope.net/net/%B5%F2%BC%D2%C0%E5.htm

딘(W. F. Dean) 소장 : 8·15 해방은 곧바로 우리민족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곧이어 9월 8일에 미군이 38선 이남에 진주하게 되면서 우리민족은 또 다른 외세인 미국에 의해 점령당했기 때문이다.

이 때부터 3년간은 미군이 38선 이남을 통치하게 되는데 이 시기를 미군정 시대라고 부른다. 딘 소장은 군정을 담당한 군정장관으로서 아놀드, 러취 등을 거쳐 1947년 11월 3일자로 이 직책을 담당하게 되었다. 제주 4·3은 딘 소장이 군정장관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발발했기 때문에 4·3의 전체 과정에서 그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그는 평화적으로 수습될 수도 있었던 4·3을 강경 토벌작전으로 선회케 한 장본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그는 무장대 사령관 김달삼과 토벌대 9연대장 김익렬 사이에 4·28평화회담이 성공리에 이루어진 바로 다음날인 1948년 4월 29일 극비리에 제주를 방문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의 방문 직후인 5월1일과 5월 3일에 경찰과 우익 청년단원들은 오라리 방화사건과 귀순자에 대한 발포 사건을 저지르면서 평화협정을 무위로 돌려놓았다. 게다가 미군은 오라리 방화사건을 지상과 공중에서 촬영하여 마치 이 사건이 무장대에 의해서 일어난 것처럼 조작하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5월 5일 딘 소장은 제주를 시찰한 후 "제주도 밖에서 온 공산분자들이 일부 청년을 오도하여 산에 가서 폭동을 일으켜 관리와 선거를 지지하는 자들을 위협 살해하고 있다"라며 4·3을 외지 공산주의자들과 연계된 폭동으로 몰아가려고 하였다. 곧 이어 그는 평화적 해결을 추진하던 김익렬 연대장을 해임하고 대신 박진경을 그 후임으로 내세워 강경 토벌 정책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딘 소장의 두 차례에 걸친 제주방문은 미국의 입장을 관철하는 데에 방해가 되는 요소를 제거하고 강경 토벌정책의 기초를 마련코자 한 것이었다. 4·3 당시 딘 소장의 행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진압작전 전과정을 통하여 한국정부의 군사작전 지휘권을 쥐고 있던 미국이 4·3 양민학살의 1차적 책임 소재자임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