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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구

2010.10.28 23:14

文學 조회 수: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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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namet1039.gif 이덕구는 4·3 당시 초대 무장대 사령관이던 김달삼이 해주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제주도를 떠나자 그의 후임자가 되어 활동하다가 최후를 맞은 4·3 무장대의 사령관이다.

북제주군 조천읍 신촌리의 넉넉한 집안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일신 상업학교를 거쳐 입명관(立命館)대학에 진학했으며 이후 학병으로 군에 입대했다가 일본이 패망하자 제주도로 돌아왔다.

귀향 후에는 조천면 민주청년동맹 책임자를 역임했으며 동시에 조천중학원 역사·체육 교사로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당시 조천중학원 학생들의 증언에 의하면 '사람이 무던히 좋았지 무슨 사상운동하는 사람 같지는 않았다'고 한다.

1947년 3·1절 발포사건 이후 미군정 경찰기관에 잡혀가 고문을 당하는 과정에서 한 쪽 귀가 멀게 되었고, 그 사건이 있은 지 얼마 후 학생들에는 육지로 나간다고 하고선 곧바로 입산하여 무장대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1948년 8월 무장대 사령관 김달삼이 해주대회에 참가하게 됨에 따라, 그의 뒤를 이어 제주인민유격대 총사령관이 되었다.

1948년 10월 이후 전개된 초토화 작전으로 사실상 무장대는 거의 궤멸 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그 상황하에서 힘겹게 명맥을 유지하던 중 그는 1949년 6월 7일, 토벌대에 의해 포위된 후 자살, 혹은 사살되었다고 한다.

1949년 6월 8일, 제주시 관덕정 광장에는 이덕구의 시신이 전시되었다. 때묻은 군 작업복에 고무신을 신고 웃옷 주머니에는 수저를 꼽은 채 입가에 피를 흘리며 십자가 형틀에 묶여있는 모습의 사진이 지금까지도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