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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포지교(管鮑之交)의 유래

2005.03.31 08:27

인내의 바다 조회 수:2318 추천:11




  춘추 시대 제나라의 중신 관중과 포숙아는 죽마고우로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다. 어려서부터 포숙아는 관중의 범상치 않은 재능을 간파하고 있었으며, 관중은 포숙아를 이해하고 불평 한마디 없이 사이좋게 지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벼슬길에 올라 관중은 왕자 규(糾)를 섬기게 되고 포숙아는 규의 아우 소백(小白)을 섬기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 안 가서 두 공자는 왕위를 둘러싸고 격렬히 대립하게 되어 관중과 포숙아는 본의 아니게 적이 되었다.
  그 싸움에서 소백이 승리했다. 그는 제나라의 새 군주가 되어 환공(桓公)이라 일컫고, 그의 형 규를 죽이고 그 측근이었던 관중도 죽이려 했다. 그때 포숙아가 환공에게 진언했다.
  “관중의 재능은 저보다 몇 갑절 낫습니다. 제나라만 다스리는 것으로 만족하신다면 저로도 충분합니다만 천하를 다스리고자 하신다면 관중을 기용하셔야 하옵니다.”
  환공은 포숙아의 진언을 받아들여 관중을 대부(大夫)로 중용하고 정사를 맡겼다. 재상이 된 관중은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마음껏 수완을 발휘해 환공으로 하여금 춘추(春秋)의 패자(覇者)로 군림하게 했다.
  훗날 관중이 이렇게 말했다.
  “내가 가난할 때에 포숙아와 같이 장사를 한 일이 있다. 이익을 나눌 때에 내가 좀더 많이 가졌으나 그는 나를 욕심쟁이라고 하지 않았다. 우리 집이 가난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를 위해 계획한 일이 도리어 그를 궁지에 몰아넣는 결과가 되었으나 그는 나를 어리석은 자라고 하지 않았다. 일에는 성패(成敗)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또 몇 번이나 벼슬길에 나갔다가 번번이 물러났지만 그는 나를 무능한 사람이라고 보지 않았다. 내게 시운(時運)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내가 싸움터에서 도망쳐 돌아온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그는 나를 겁쟁이라 보지 않았다. 내게 연로한 어머니가 계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자 규가 후계자 싸움에서 패했을 때 나는 염치없이 죽지 못하고 포박당하는 치욕을 당했으나 그는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천하에 공명을 떨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정말 치욕이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나를 낳아준 것은 부모지만, 나를 알아준 것은 포숙아다.”  
                                                            - 『사기』,「춘추좌씨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