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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 동원 사례

2019.08.01 07:28

文學 조회 수:105

[경향신문] ㆍ일제강점기 ‘아동 강제동원’ 사례 살펴보니

항공기 제조 공장에 동원된 학도근로대의 조선인 소녀들. <아시아태평양전쟁에 동원된 조선의 아이들> 수록 사진

굶주림·질병·성폭력 등 시달리다 죽어서야 공장문 나서기도 소년들은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주로 군수공장·탄광산 끌려가

“나는 강원도 평강군 현내면에 살았습니다. 벼를 타작하면 일본 순사들이 와서 싹 쓸어가 살기가 말도 못하게 힘들었지요. 어느 날 학교 마치고 집에 갔는데 순사하고 아버지가 마당에 서 있었어요. 아버지가 만주 보국대로 징용 간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를 보낼 수 없어 내가 대신 가겠다고 했습니다. 기차 타고 가는 내내 울었어요. 그때 내 나이 9살이었습니다.”

1931년생인 옥순 할머니는 서울 영등포에 있는 방적공장으로 징용됐다. 전국에서 징용된 또래 소녀들과 함께 실을 만드는 일을 했다.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배고픔이었다.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면 식당에 가서 쓰레기통을 뒤졌습니다. 그러면 무 껍질, 수박 껍질 같은 게 나왔어요. 그걸 주워서 잘 씻어서 언니들이랑 나눠 먹었습니다. 껍질을 구하지 못하면 소금으로 배를 채우다 설사를 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개나 돼지도 그렇게는 안 먹일 겁니다.”

공장에서는 매질도 있었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고 때리고, 실을 끊어 먹는다고 때렸다. 감독들의 화풀이는 매일 어린 소녀들에게 쏟아졌다. 하지만 매질의 고통보다 가슴 아픈 기억은 아버지와의 짧은 면회였다. “하루는 아버지가 감자를 쪄서 면회를 오셨어요. 얘기도 몇 마디 못했는데 면회 시간이 다 끝났다고 했습니다. 눈물 흘리는 아버지에게 ‘울지 마세요, 울지 마세요’ 하다가 나도 울었습니다. 아버지의 건강한 모습을 뵌 것은 그때가 마지막이었습니다.”

■ 죽음보다 더한 고통 겪은 소녀들

운이 좋아 살아남으면 다행이었다. 죽어서야 공장문을 나설 수 있었던 사례도 많다. 1933년 12월 충남 태안군에서 태어난 옥련은 1944년 8월 부산에 있는 조선방직공장에서 사망했다. 옥련의 유일한 유품은 ‘소화 20년(1945년) 6월28일 오전 4시 부산부 범일정 700번지 조선방적 기숙사 사망’이라는 사망신고서 하나였다. 왜 사망했는지는 알 수 없다. 1929년 전북 김제군 출신의 귀녀는 1942년 3월 광주의 가네보 방적공장에서 폐병에 걸렸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13살 소녀는 감독에게 제발 집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감독은 “지금 시국에 이 정도로는 귀가 조치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귀녀는 1945년 5월13일 죽어서야 공장문을 나설 수 있었다.

폐쇄된 공장에 갇힌 아이들은 성폭력에도 무방비로 노출됐다. 1931년 충남 서천에서 태어난 연순은 11살 때인 1942년 영등포에 있는 한 방적공장으로 끌려갔다. 연순은 1944년 정신착란증에 걸려 공장을 나왔다. 집으로 돌아온 연순은 여섯살 아래 동생에게 “방적공장에서 수시로 헌병대에 불려가 성폭행을 당했다”고 했다.

■ 군수회사·탄광에 끌려간 소년들

1943년 10월 후쿠오카현 야마다 탄광으로 동원된 여주 출신 조선 사람들이 탄광에 도착해 찍은 단체사진, 앞줄에 어린 소년들의 모습이 보인다.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 소장 자료

남자아이들도 징용에 끌려가긴 마찬가지였다. 주로 군수공장에 끌려갔다. 당시 한반도에는 802군데의 군수공장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사망한 소년이 얼마나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가해국인 일본도 피해국인 한국도 조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두세 줄의 짧은 사망기록으로만 남겨져 있다. 병주는 1929년 9월 전북 임실에서 태어났다. 병주가 14살 되던 1943년 8월, 함경남도 흥남에 있는 일본질소비료(주) 소속 군수회사로 동원됐다. 병주는 7개월 만인 1944년 3월, 공장 부속 병원에서 사망했다. 사망 원인은 알 수 없다. 용철은 1929년 8월 충남 연기에서 태어났다. 역시 14살 되던 1943년 12월, 병주와 같은 군수회사로 동원됐다. 용철도 11개월 만인 1944년 12월,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사망했다.

소년들은 주로 광산으로 동원됐다. 대부분 1944년 말에서 1945년 초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더 이상 마을에서 성인 남성을 찾기 어려우니 소년들을 데려간 것이다. 당시 일본에는 887곳의 탄광산이 있었다. 1930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난 태순은 14살 때 일본 홋카이도 미쓰비시광업 소속 신시모카와 광산으로 끌려갔다. 징용 온 태순을 본 일본 회사 직원은 “어디서 이렇게 꼬맹이를 데려왔냐”고 할 정도였다.

국내 탄광산으로 동원된 사례는 더 많다. 짧은 사망기록으로만 남아있는 소년들도 많은데 이들 중 최연소자는 12살에 동원된 낙천이다. 1931년 4월 전남 함평 출신인 낙천은 1943년 1월 함경북도 회령군 이와무라 탄광에 동원됐다. 22개월 만인 1944년 12월20일 갱내에서 사고로 사망했다.

■ “체계적인 조사·연구 절실”

2004년부터 2015년까지 운영된 국무총리실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는 접수받은 피해사례 21만여건을 강제동원으로 판정했다.

하지만 이후 정부 차원에서 해당 사례들을 활용한 지식화·정보화 작업은 없었다. 관심 있는 연구자가 피해자들을 알음알음 찾아다니며 구술을 듣는 것이 후속 연구의 전부다. 이마저도 피해자들의 고령화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정혜경 박사는 “정부에서 개인정보 등을 이유로 접수받은 피해 내용들을 공개하지 않는다”며 “개인정보 부분만 가리고 공개해도 징용 문제를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또 “피해사례들을 활용한 다양한 연구가 진행됐다면 일본이 지금처럼 큰소리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학자들은 일본에 대한 경고도 잊지 않았다. 인천대 이상의 교수는 “피해자들을 찾아다니며 구술을 수집하고 있다”며 “일본이 강제동원 과정에서 ILO 협약을 명백하게 위반한 사례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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