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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혈압과 어지럼증

고혈압은 불치병이라는데...20년을 되 찾은 느낌이든다. 고혈압 약을 복용하기 시작한지 20일만에 끊었다. '한 번 약을 먹기 시작하면 평생 끊지 못한다는데...' 그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전혀 효과가 없었으며 대신 20년을 늙게 만들었던 약에 대하여 나는 목숨을 담보로 생각하고 끊었다. 그리고 나서 오히려 달라진 인생을 나는 누구보다 기뻐하고 있다. 그 20년을 덤으로 되찾아 놓고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하여 새로이 생각한다. -본문 중에...- 120-80이 정상혈압

병원에서... (4)

2009.03.14 22:52

文學 조회 수:4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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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314일 토요일

                                       1
  먼저 쓰러진 것이 과로 탓이었을까?

점심을 마치고 축사 앞까지 농노 길을 따라 화물차를 운전하였다. 조금 전에 집에서 나와 동네 입구의 슈퍼마켓에서 찰떡을 넣은 아이스크림을 아내가 컵라면과 함께 사왔으므로 차내에서 한 개씩 먹었다. 도시에 나가 있는 아들을 토요일과 일요일에 일을 시키고 10만 원을 주기로 했는데 어제부터 일하여 이제 이틀째였다. 이곳 소읍(소읍)에서 고등학교 3학년 말에 주유소 아르바이트를 하여 틈틈이 돈을 모았고 그것으로 대학교 수업료를 보태었다. 그런데 도시에 나간 뒤부터는 전혀 아르바이트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웬걸…, 도시에서는 주유소 아르바이트를 하려면 22세가 되어야 한데요!”
  “그렇게 나이 연령을 높이면 이제 19세인 아들은 못하고….”
  그렇게 딸과 아내가 휴대전화로 주고받는 말을 엿들었을 때는 나조차 상심이 컸었다. 그래서 축사에 세를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방을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받고 2층으로 방을 꾸미는 막일에 일해달라고 아내가 불러들였던 것이다.

  아들과 딸 둘을 낳아 키우면서 될 수 있으면 관여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었다. 특히 딸보다 아들에 대한 무관심은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였으므로 외박을 하여 남의 집에서 자고 오는 날에조차 잔소리를 하지 않았었다. 못된 친구들과 도둑질을 하던가 싸울망정 관여하지 않겠노라고 천명하였었다. 대학교에 진학할 때,
  “가급적이면 이곳에 있는 2년제 전문대학교 가는데 어떠냐?”라고 충고를 했었다. 그렇지만, 학교에서 선생님과 상담을 한 뒤로 태도가 일변하였는데,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말고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 하였다고 찰떡같이 믿는 것이었다. 도시의 모 대학교 전자공학과에 원서를 턱 하니 넣고 합격을 하였지만 무슨 기술이 있다거나 전문적으로 배우려던 것이 아닌 맹목적임을 알고,
  “네가 알지도 못하는 전자과에 원서를 넣었는데 지금까지 전혀 알지도 못하는 것을 무엇 때문에 배우려는 거냐? 그 계통은 1년의 빠르기가 옛날의 10년과 같은데….”라고 따지기도 했었다.

                                        2

  맑고 청명한 하늘이었다.

  봄이 들녘에 오고는 있었지만, 실감이 나지 않는다. 논둑은 풀이 메말라서 갈색 빛을 띠었고 논은 짙은 회색빛으로 농노 길옆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야산으로 이어지는 지점에 좌측 편의 야트막한 언덕을 배경으로 축사가 덩그러리 축대 위에 지어져 있었다. 농노 길 옆으로는 농업용 수로였지만 지금은 물이 흐르지 않았다. 이웃한 다른 계곡에서 이곳으로 농업용 관정을 연결하여 물을 대기 전에는 건천(물기가 마른 하던)이었으므로 바닥에 약간의 물기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점심을 집에서 먹고 오는 이유가 있었다. 이곳까지 식사가 배달을 잘 오지를 않았으므로 으레 그런 줄 알았지만, 한편으로는 돈을 절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K.D1년 전부터 세를 들어왔었지만, 그전에 2년 동안은 전혀 세를 놓지 못하였었다. 그러던 것이 작년 꼭 이맘때 K.D를 만났고 한 살배기 남자 아이를 등에 업은 부인과 함께 이곳에서 공장으로 세를 얻고자 찾아왔을 때만 하여도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무엇보다 그들이 원하는 살림집을 공장에 마련해달라는 부탁을 들어주려고 500만의 비용을 들였었다. 그때도 이렇게 직접 벽돌을 쌓는 막일을 하고 모든 것을 주관하였으므로 사실 이런 일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불과 10분 후에 나는 극심한 어지럼으로 위급환자가 되어 병원에 실려가는 일이 발생하게 되는데 지금도 그 병명을 확실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축사 앞에 이르렀지만, 농로로 통하는 진입로에는 마침 두 사람이 1톤 화물차 두 대를 대놓고 수리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이들을 모두 아는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들어가고 저하는 방향으로 진입로를 막고 고장 난 차량을 고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옆집으로 들어가는 진입로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고장 난 화물차는 모두 U.K의 차량이었다. 그는 고물상과 축사를 병행하였는데 차량을 두 대나 갖고 있었다. 오래된 형식의 차량이 고장 나면 남자 조카와 여자 조카의 남편을 불러서 고쳤는데 이들 두 사람은 내가 농로 길에 차가 빠진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와서 도움을 주고 내가 3만 원씩 준 적이 있었다.

  U.K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경매로 낙찰받은 축사의 원주인이었다. 그는 축사를 운영하면서 많은 빚을 졌는데 세 곳의 은행에 무려 30개가 넘는 가처분은 축사에 등기부에 올려져 있었으므로 그것을 확인하고 해당하는 만큼의 비용을 더 내고 풀어야만 했었다. 극심한 자금난으로 경매 처분된 축사를 낙찰받고 나서 U.K 이와의 대립은 우려할만한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그가 옆에 조립식으로 3평 정도의 집을 짓고 살게 되면서 우리에게 피해를 준 것은 경계를 긋지 않은 진입로에 진출하여 차를 세워 놓는 것과 고물 더미를 쌓아 놓는 것을 제외한다면 그다지 싫은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항상 보이지 않는 경계를 넘어오는 것이었다. 지금도 차량 두 대를 세워놓고 진입로를 가로막은 탓에 나는 그 앞에 내 차를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하늘을 보았지만 정말 청명한 날씨였다. 이런 날씨에 봄나들이라도 가고 싶어진다. 그런데 노동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죽기보다 싫은 느낌이 든다.

  차 문을 닫은 탓일까 아니면 좁은 차 안에 세 명이 탔기 때문일까? 무덥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눈앞이 어질 거리며 약간의 현기증이 일어나는 듯싶었다. 이 순간에 나는 가만히 차 안에서 기다리던가 안정을 취하였으면 아마 더 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차에서 내리고 나서 힘껏 문짝을 힘을 주워 닫았다. 차 문이 잘 닫히지 않은 것을 염두에 두고….

  두 번째의 현기증이 어지럽게 몰아 닥쳤고 뒤이어 땅이 꺼지는 것처럼 흔들리는 기분이 들었지만 애써 태어난 척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이때도 내 몸의 상태가 최악의 상태로 치닫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는데 두 번째의 현기증이 일어나면서 눈앞이 흔들렸지만 참는 것이 화근이었던 것 같다. 평상시만 같아도 이상이 없을 아무런 신체적인 변화에 대하여 나는 앞으로 닥칠 위험을 전혀 예측하지 못하였으니….
  “차가 고장 났나?”
  “어이쿠, 미안합니다!’

  U.K는 눈에 띄지 않았다. 자기의 차를 조카들과 조카 사위에게 맡겨놓고 다른 곳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은 그의 성격과 무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매사에 불확실한 사람이었다. 그런 성격과 무관하게 언제나 축사로 진입하는 길목은 그의 차지였다. 나는 언젠가 본 때를 보여주리라 벼르고 있던 차였지만 그렇게 야박하게 굴지 못했다. 진입로에 울타리를 치면 그가 입구가 막혀 버릴 것이므로 곤란을 당하리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내를 실험하는 것처럼 진입로 쪽은 각종 고물, 쓰레기로 저희 쪽으로는 잔뜩 쌓아 놓고 우리 쪽으로 이용을 하는 탓에 불편을 감수하는 게 문제였다.
  지금도 나는 U.K를 문제 삼고 길을 비켜달라고 할 참이었다.
  “보다시피 차가 고장이 나서... 죄송합니다만 잠시 기다리시는 편이...”
  U.K 의 조카 사위는 다마스(봉고차)라는 작은 차량에 온갖 자동차 도구를 갖고 다니는 떳따방(고장 수리차량)을 하는 듯했다. 지금도 그가 수리를 전담하였지만 처남과 함께 수리를 하는 중에 두 대의 차량을 붙여 놓고 밧대리로 시동을 시도하는 중인 듯 싶었다. 불과 몇 분전에는 막혀 있지 않는 곳에 두 대의 차량을 세워 놓고 진입로를 차단하고 있는 두 사람을 뭐라고 하고 싶지는 않았다. 금방 고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U.K의 조카가 말했다.
  “트랙터에 운반용 수레를 연결하려고 하는데 재료가 없지요?”
  “그래.... 운반용 수레는 어디 있어?”
  “저 쪽에 있는데요!”
  그가 가리키는 곳을 나는 보았는데 이웃한 또 다른 축사 옆의 논바닥이었다. 불과 50여미터 거리였으므로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서 얘기해야만 할 듯 싶었다. U.K의 조카는 나이가 서른 살이 약간 넘었고 아버지를 닮아서 말이 어줍고 걸음걸이가 저는 듯 싶었다. 그 아버지가 병신으로 태어나서 사람구실을 못한다고 늘상 욕을 먹었었지만 그나마 여자를 구해 일 남 삼 녀를 두웠고 그 막내인 아들이였다. 제 어머니와 아버지를 자주 보아왔던 터라 야박하게 할 수 없는 것이 인지상정이라고 하는가! 기구한 그 어머니와 아버지의 관계를 나는 언제가 소설로 기술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했었다. 그만큼 그 부모는 세상에서 부족한 삶을 살아야만 했었다. 지체부자유로 태어난 아버지 그리고 서커스를 따라 찾아왔던 이곳에서 의지할 곳이 없이 지내다가 우연히 시아버지라는 사람에게 발견되어 찾아와 연분이 된 남자는 한없이 부족한 불구자였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