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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성에서 ...

3일 째, 마침내 들깨를 심는다.

2016.07.18 19:07

文學 조회 수:401

어제는 청성의 밭으로 경운기를 싣고 갔다. 아들과 아내는 아래 밭에서 호미로 절반 가량은 옥수수가 심어져 있고 절반은 아무 것도 심어져 있지 않은 곳에 콩을 심게 하고 나는 500미터 떨어져 있는 위의 밭으로 1톤 화물차를 끌고 와서 <대형양수기 건물> 옆에 기울게 차를 후진으로 대고 사다리를 걸친 뒤에 경운기를 내렸다.


얼마나 감격적인 하루인가!

기계 제작 일이 바빠서 지금까지 밭에 아무 것도 심지 못한 상황.

마음 적으로 늘 가시처럼 찔러 대던 고통스러운 마음.

모든 게 교차를 한다.


2년 전에는 혼자 와서 밭을 매고 콩심는 기계로 팥을 이 밭에 모두 심었었는데 고라니 때문에 작년과 올 해는 들깨를 심게 된 것이고 심으려고 하는 것이다.

들깨를 심기에는 너무 늦었다.

어찌어찌하다보니 늦어 졌지만 그나마 늦게라도 심는 건 농사일이 늘 그렇듯이 때를 맞추기가 쉽지 않아서다.

물론 농사를 짓는 농부라면 그렇지 않겠지만 본업이 따로 있으므로 힘든 농사일을 하기위해서는 다른 일을 전폐하여야 하므로 그게 쉽지 않아서다.

'

 위의 밭에는 들깨를, 아래의 밭에는 콩과 팥을 심게 되었는데 혼자 왔을 때와 다르게 한결 작업 속도가 빠르다. 식구가 동원된 농사가 의외로 능률적이였으므로 그 전원 생활에 한껏 고조되었고...

  내가 가장 싫어 하는 것은 태양빛이었다.

  살결이 타서 얼굴과 손등에 검은 반점이 생기는 것을 탁구동호회에 나가면서 부끄럽게 생각할 수 밖에 없다보니 얼굴까지도 가리고 긴팔을 입고 장갑까지 끼운 상태로 밭 일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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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0평의 <위 밭>을 세 번째 와서 갈게 되고 들깨까지 심는 과정은 3일이 걸렸다. 첫 날에는 예초기로 풀를 베었고 둘 째 날에는 제초제를 뿌렸으며 세 째 날에는 경운기로 밭을 갈고 <콩심는 기계>로 들깨까지 심게 된 것이다.

그것이 가장 빠른 방법임에는 틀림이없었다. 12km 남짓 거리는 거리를 그나마 세 번씩 왕복하면서 보낸 시간적인 아까움보다도 세 째 날에 결국에는 밭을 모두 갈아서 들깨를 심게 되었다는 행복감(? 적당한 표현이 생각나지 않음)에 젖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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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하루 일당이 8만원짜리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이고 그나마 아내는 함께 공유하는 내조자였다. 이곳에서 수확하는 작물의 주인은 모두 아내 몫이었다. 나는 한마디로 노비였으니...

'죽써서 개 주는 꼴이 아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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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가장 좋을 때였다. 8만원짜리 일당에 놀면서 일을 하니 어디 신나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공장에서 일을 하는 게 낫다고 불만을 나타낸다. 농사 일을 해서 제 일당을 벌지도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나와서 꼬박꼬박 일당은 챙겨가면서 야외에 나와 바람도 쐬고 자연 경치고 만끽하면서 오히려 제 자신이 그만큼 마음이 넓어 졌다고 하지는 못할 방정 땡볕에서 일을 한다고 투정을 부린다. 그렇지만 반팔을 입고 밭에 나와서 고작 하는 일은 곡갱이로 줄을 그어주는 것과 나중에 그 일이 끝나자 제 엄마가 하던 일을 대신하여 기계로 들깨를 심고 있는 중이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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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경운기로 밭을 가는 일을 분담했다. 오후 4시쯤에서야 겨우 마칠 수 있었는데 사실상 이렇게 셋이서 밭에 오는 경우은 드물었다. 앞에 이틀도 그랬지만 나 혼자 와서 밭을 갈고 콩.들깨.팥으르 기계로 심고 가곤 했었다. 그럴 때마다 이틀을 이곳에서 지세우기 일쑤였었다. 집에 가지 않고 차를 받혀 놓은 지하 관정이 있는 건물에서 돗자리를 펴고 누워 잤었는데 그 때마다 온갖 상념이 다 깃들곤 했었다.  
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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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운기로 먼저 밭을 갈고 밖으로 나와서 뒤 정리를 하는 아들과 아내를 바라보고 서 있는 중에... 행여 사진으로나마 남길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하면 이런 추억은 잊혀지기 마련이었다.

  "여보, 사진 좀 찍어 줘!"

  그렇게 내가 곡갱이로 밭에서 정리를 하고 있는 아내에게 부탁을 했더니,

  "알았어요!" 하면서 사진기를 받아 들고 착칵하면서 찍어 준다. 

  그렇지만 땡볕에서 밭을 갈고 일을 하는 게 영 못마땅해서 투정을 부리는 아내였다. 그러다보니 함께 나오지 않고 이틀 동안은 혼자서 나왔었고 단 하루에 셋이서 함께 일을 하게 되니 훨씬 능률적이었다. 하지만 혼자서 다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셋이서 분담을 하니 빨리 끝내고 그만큼 능률적이라는 느낌을 배제하지 못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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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 일을 다 마치고 경운기와 필요한 장구들을 모두 차에 실었다. 아들은 애인과 데이트가 있다고 먼저 보내 놓고 나와 아내는 이웃에 새로 이사온 이웃사촌을 보러 가게 되었는데 김해에서 전원주택을 짓고 이사를 온 젊은 부부는 그나마 이곳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벗이기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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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차가 된 1톤 화물차. 물건을 모두 뒤에 있는 밭으로 옮겨 놓았으므로 빈차만 덩그런히 서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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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을 모두 갈고 마지막으로 정리를 한다. 잡풀이 허리 높이까지 자랐던 만큼 그것을 모두 정리하고 말끔하게 단장을 시키는 노력을 한 뒤에 포만감은 무엇으로 바꿀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이었다. 그리고 잡초가 자라서 마음 속으로 꺼림직하였던 만큼 이제는 한 해 농사를 그나마 짓게 되었다는 의외의 행복한 심정으로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신의 느낌을 선사 받는다. 작물을 재배하고 그것을 수확하기 위해서 넘나드는 신의 손길로 이 땅에 그나마 들깨라도 심께 해 준 자연에 감사할 따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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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놈이 휘바람이라도 불고 싶은 심정인가 보다. 한결 여유가 있는 모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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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 심는 기계로 들깨를 심게 되면 양을 가름할 수 없을 정도가 된다. 그러다보니 조금 많을 수도 적을 수도 있는 씨앗이 심어지는 것이다. 사실상 그렇게라도 해서 나중에 묘목처럼 심는 과정을 생략할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내가 들깨모를 별도로 심어 놓고 그것을 다시 옮겨 심는 것과 그 두 번째의 호미질하는 모습이 너무나  내가 선택한 방법은 콩 심는 기계로 직접 파종을 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올 해는 너무 늦게 심어서 조금은 걱정이 든다. 작년에는 6월 30일에 심었으므로 올 해는 대략 17일 정도나 늦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중간에 비료를 주워야 할 듯하다. 싹이 나오면 그곳에 비료를 풍성하게 뿌려 주면 좀더 성장을 할 수 있으리라고 볼 수 잇었다. 하지만 비료가 없이 맨땅에서 크게 되면 성장.발육도 별로 크지를 않고 수확도 형편이 없었다. 이곳 470평의 밭에서 들깨를 거둬 들이는 것보다 아래 170평 논을 개량한 밭에서 얻는 양이 더 많을 지경인 것도 그 이유이리라! 어쨌튼 콩 심은 데 콩 나고 들깨 심은 곳에 들깨가 나오는 건 세상이치와 같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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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에 연속으로 가게 되면서 이틀 째 날에는 가슴과 아랫배가 울굿불굿 해졌고 가려웠다. 땀띠가 난 것이다. 밤에 자기 전에 계속 극적 거렸고 잠을 자면서도 가려워서 극는다고 아내가 지적을 해 줬는데 땡볕에서 작업한 영향이었다. 훈장처럼 땀띠를 얻는 것이다. 그렇지만 공장에서 기계를 만들 때는 머리가 지근거리고 무거웠는데 이렇게 한적한 자연 속에서는 그런 시름을 금새 잊고 맑고 정갈한 느낌이었다.

  왜, 그럴까?

  전혀 머리가 아푸지 않았던 것은 아무래도 시원한 자연의 공기와 전경 탓이리라!

  이렇게 자연 속에서 산림욕을 만끽하면서 일을 하는 즐거움에 음뻑 빠질 수 있음을 신께 감사드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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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과 아내가 마지막 작업 중이다. 사실 경운기로 이 밭을 갈면 하루가 걸린다. 그것도 새벽부터 갈아서 혼자서 콩심는 기계로 심게 되면 이틀이 꼬박 길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장마 전선으로 오전 11시 경에 도착을 하였을 때는 구름이 끼고 햇빛이 없다가 오후 들어서면서 구름이 걷히고 뜨거운 빛이 내리 쏘여서 무더웠지만 그런 것을 참을 수 있는 건 아직은 장마기가 있어서 강하지 않은 햇빛으로 견딜 수 있을 정도였다. 사실 시골 사람들은 한낮에는 일을 하지 않는다. 아침과 저녁으로 해가 누구러진 상태에서 농사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한 낮에는 사람들이 전혀 없었지만 오후 5시 쯤에는 하나 둘 씩 밭에 나와서 비료를 뿌리고 경운기로 농로길을 따라 오르락 내리락 했다.

하지만 이곳 마을에는 노인들이 대부분이여서 우리와는 안면이 없었다.

한 달 전에 왔다는 밭에서 농로를 경계로 맞은편에 종가주택을 짓고 김해에서 이사를 왔다는 젊은 부부(사실 55세라는 남자분)는 연배가 비슷해서 매우 가깝게 지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첫 날 내가 울타리에서 기웃거리자 부인이 대문까지 나와서 아는 체를 한다. 하루 종일 예초기 소리가 창문 밖으로 들려와서 관심을 갖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물 좀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집을 새로 짓고 이사오신 분이 궁금배서요!"

  "아. 예... 잠깐 들어오세요. 냉커피를 타 들일께요!"

  나는 너무 거절하는 것도 아닌 것같아서 차로 가서 아내가 찬거리로 싸운 도우너스를 세 개 들고 찾아 갔었다.

  그리고 이틀 날에는 마트에서 파는 토막을 낸 5,900원 짜리 냉동닭을 주면서,

  "복 날이 내일 모래라는 데 두 분이서 해 드셔요!" 그렇게 말하자,

  "아니, 뭐 이런 걸... 가깝지도 않은데 사오셔요?"

  "이제 이웃 사촌 아닙니까? 그마나 저희들에게도 잘 되었습니다. 근처에는 젊은 사람도 없고 적적했었는데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습니다. "

  그렇게 둘 째 날에는 냉동 닭을 선물 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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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을 모두 갈고 나니 그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 쉬게 되었다. 올 해 들어서 농사를 짓는 게 처음이었는데 그동안 잡초가 허리 높이까지 올 정도로 자랐던 탓에 언제 갈아서 작물을 심을까? 걱정이 끊이지 않고 괴롭혔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은 한결 다행스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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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에서 이곳 청성까지 와서 전원주택을 진 이유가 무얼까?

  그렇게 의문이 들었던 만큼 마주 대한 이웃 사춘에게 내가 묻게된 첫 마디가,

  "왜, 이렇게 구퉁이로 숨어 사는 사람모챵 들어오게 되셨는지요?"

  하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땅 값이 싸서지요. 한 평에 5만원 밖에 되지를 않으니..."

  "아, 그렇군요! 제 생각도 그랬으니까요!"

  그러면서 집이 져 있는 땅이 600평 정도 되므로 삼 천만원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런데

  '그렇게 적은 액수의 돈으로 그만한 부지를 부산에서는 마련할 수 없는데... 가장 값이 저렴한 곳은 어디일까? 또한 중간지역이여서 서울과 부산지역을 오갈 수 있는 충북 청성 지역으로 전원주택지로 선택하였자!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을 소개해 준 곳은 어디입니까?"

  "옥천의 부동산 센터인데... 용달업을 하면서 알아본 바로는 이곳이 가장 저렴해서 적은 돈으로도 원하는 만큼 부지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

  "우리도 저 쪽 밭을 오백 만원 주고 산 것입니다. 비록 경매지만..."

  "이 곳이 개발이 되지 않고 무척 조용하면서 싼 가격으로 토지를 구입하는 적기라는 결론에 처음에는 다른 곳에 밭을 구입했었지만 집을 짓기에는 좋지 않다고 보아서 다시 이 땅을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

  "처음 구입한 곳은 어디지요?"

  밑에 동네가 있는 곳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불편해서 싫어 합니다. 특히 아내가 사람들을 겁내고 있어서... "

  나는 아주머니에게 그 내막을 들어서 이미 알고 있었다. 심장질환을 앓고 있어서 조그마한 충격에도 실신하고 한다는 점과 며칠 전에 동네에 살고 있는 할머니가 찾아와서 고래고래 소리를 치고 집까지 쳐들어와서 놀래서 병원에 입원하기까지 했다는 소리를 듣고는 그 정도로 힘든 생활을 하는 것과 남편이 아내가 도시에서 살다가는 제 발에 놀래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의사의 권고를 듣고 한적한 시골로 찾아오게 되었다는 내용을 들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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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0평의 위 밭. 170평 아랫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