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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출장

생각 모음 (200)

2016.04.15 20:03

文學 조회 수:190

2010년 4월 10일

 

·1. 열차 안에서 글을 쓰는데 노트북을 LED로 갖고 오지 않아서 배터리가 금방 떨어질 것 같다. 한 개를 더 챙겨오긴 했어도...


왜, LED 노트북을 갖고 다니지 않는가! 그걸 집에서 매일 사용하고 있었으므로 가방에 들어 있던 것과 교환하지 않았다. 이렇게 기차 여행을 하면서 다니게 된다는 생각을 못하고  차량을 갖고 다닐 때의 습관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에 비한다면 태블릿PC의 배터리 사용시간은 무척 길은 편이다. 무려 9시간이나 유지되었으므로... 집에서 나올 때 가방에 넣고 나오다가 사무실 책상에 내려놓았다. 아직 태블릿 PC로 기계에 프로그램을 입력 시킬 수 없었으므로 등에 메고 다니는 출장용 가방의 무게와 공간을 차지하고 있을 터였다. 무엇보다 화면만으로 글을 쓸 수 없었으므로 키보드가 부착된 상태가 아니면 갖고 다니기 힘들 터였다. 어쨌든 출장을 다닐 때 오랜 시간 글을 쓸 수 있었으면 좋을 듯싶다. 그런 의미에서 LED 노트북을 갖고 나왔어야만 했다. 아직까지는 태블릿PC의 사용이 자연스럽지 못함도 그 이유겠다. 배터리의 부족문제로 인한 불안감은 노트북 컴퓨터를 사용할 때는 언제나 따라 다녔던 문제였다. 그리고 지금에 있어서 P560 노트북의 LED화면을 절전형으로 보았지만 그것도 태블릿PC가 있기 전이었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 지금으로서는 야간보다 새벽에 출장을 나간다.

  어제 왜관에서 돌아오면서 느끼던 맑은 정신을 보았다. 그토록 활기가 넘치고 신선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왜, 그전에는 고리타분하고 흐리멍텅하다고 여겨왔을까? 그처럼 내 주변의 불안감을 떠올려 볼 때 그것을 나는 제 1기의 증상으로 인하여 심적으로 부담감을 느껴왔던 탓이라고 일컬어 왔었다. 무언가 내 주변을 감싸고 있는 공기가 그 불안감의 원인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전혀 볼 수 었었던 새로운 세계를 탐문하고 돌아왔으며 그것이 새 삶을 갖게 하였지만 완전하지가 않았다. 아무래도 이런 느낌을 모친이 갖고 있는 건 아닐까?


Fiction :  모친의 얘기를 이런 내용으로 맞춰보자!

자식에 대한 모성본능이라고 할까? 유난히 큰 아들에게 부담을 많이 지우면서 결과적으로는 함께 생활하지 못하는 게 그다지 문제될 건 없었다.

노인 복지 정책으로 인하여 최저생계비가 지원되고 복지회관에서 지원자를 받아서 학교 선도위원으로 일주일에 두 세 차례 학교에서 근무를 서면 되었는데 그런게 돈으로 되어 통장으로 입금되는 즐거움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양상이었다.

  그녀는 종이상자가 많이 나오는 물류창고에서 다시 하나를 늘렸다.

  “아주머니, 우리 박스도 갖고 가실래요?”

  그러지 않아도 박스를 줏는 일이 벅차긴 해도 하나 더 받게 되는게 대수냐 싶었고 그 이유의 가장 큰게(?) 그 놈의 돈이었다.

  “누가 박스를 줏는다고 말하면 돈을 줏는다고 생각해 봐요! 그럼, 편하지...”

  복지관에서 같은 동년배인 할머니와 할아버지들과 함께 생활하는 중에 그나마 위안을 받곤 했었다.

  육개월에 한 번씩 독거노인에게 정부미(쌀)이 배급되었는데 그 재미도 솔솔했다. 그러다보니 혼자사는 게 편하면서도 그런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을 정도로 새로운 벌이가 몸을 축내기 이전에는 어느 정도 살만하다 싶었다.

  하지만 칠십 구세가 되면서부터는 체력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키가 작고 왜소했으며 고개가 꺽여들었는데 그건 젊어서 머리에 다라를 이고 장사를 하여 던 것과 고개가 다쳤는데 병원에 가지 않아서였다.

  그녀 자신의 무표정함.

  두눈을 부릅뜨고 고개를 저으면서 말을 하다보면 가끔씩 고개가 흔들렸다. 똑바로 쳐들지 않는 고개 때믄에 머리는 항상 숙여져 있었다.


2. 동거인인 모친에 대하여...

자꾸만 오줌을 싼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기회만 있을 때마다 일으켜서 화장실로 보낼 생각이다. 오늘 아침에도 4시10분에 깨어서 출장을 나오기 위해 가방을 챙기기 전에 모친을 깨워서 화장실로 보냈다.


3. 부산에 출장을 나가는 오늘은 양상이 매우 달랐다. 그 전에는 야간열차를 탔었다. 그리곤 몸 상태가 정상적이지 않았는데 다시 잠을 한줌도 자지 못한 체 다른 날에는 럭키지관에 도착하였고 영동역에서 혈압측정기로 측정하자 150에 육박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 이전에 오산출장으로 인하여 운동부족으로 체력이 약화된 것을 원인으로 삼을 수 있다. 그 당시에 몸 상태는 최악이었으니까?

  sex 도중에 발기 부진을 겪었다.

  어제는 왜관에 출장을 나갔다 왔는데 정확하게 말하자면 200mm 샤프트를 장착하는데 치수를 맞출 수 없다는 사소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장을 가서 앞서 얘기했던 대로 샤프트의 베어링이 들어 있는 케이스의 턱을 그라인더로 갈아냈다. 


4. 날아가는 오리 3편을 완성한다. 그리고 1, 2, 3, 편을 함께 넣어서 판매할 수 있게 한다.  한 묶음을 모아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드는 것이다.


5. 무조건 글을 쓰는 것보다 하나씩 연관된 얘기로 서술해 보자! 그렇지만 기계제작 일에 쫓기듯이 살고 있으면서 한 치의 여유도 없는 지금의 생활에 좀더 문학적인 활력을 갖도록 종용하는 것은 무리였다.


6. 내가 부산으로 출장을 나가는 동안 아내는 일 할 것을 찾지 못해서 쉬하고 했다. NC 기계 작업을 하게 되면 아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내가 계속 출장을 나가면서 자리를 비우자 기계로 쇠를 가공하여 뒤처리를 맡겨야만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므로 전혀 뒤를 이를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은 심각할 정도로 우려할 만한 일이었다. 기계의 진척이 조금도 이루지 못한 상태였으니까? 그렇다고 내가 자리를 비우고 있으므로 아내 혼자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일요일에 일을 하고 평일에는 쉬는 게 최선책이었다.

  그만큼 하지 못한 일로 인하여 일요일에는 밀린 작업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항상 내 생활은 이렇게 평일에는 출장을 나가는 반면 휴일에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계제작일이란? 그다지 안정적이지 않은 이유다. 


7. 경안 가리에서의 기계 프로그램을 구성 시키면서...


  미로의 터널속이다.

  전기 콘트롤 작업으로 하얗게 밤을 새운 다음 날. 모든 내용을 지워 버리고 다시금 새롭게 구성시켜야만 할 정도로 수없이 많은 바이러스가 달아 붙어 있었다. 그 터널은 내가 연결을 시켜야만 이어졌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서 기계의 동작이 연결되어 졌는데 중간에 작동을 다른 곳으로 빠져 나가게 하는 바이러스가 에러를 유발시켰다.

  그래서 터널에서 다른 U 턴을 시키는 원인을 찾아 내려고 했는데 좀처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는 아침이 밝아 왔는데 어떻게 보낸는지도 모르게 프로그램을 구성하다가 그만 포기를 하여야 된다고 생각한 뒤에 바람을 쐬리려고 밖으로 나섰다.

  자신의 모습은 납루한 작업복 차림이었다. 


  계속되는 압박감 속에 이제는 포기도 생각해 본다. 어쩌면 이렇게 끝도 알 수 없는 미로 속을 헤매는 꼴이었다.

벌써 6개월째지만 가끔씩 출장을 와서 수정을 하게 됨으로서 오늘은 종지부를 찍고 싶었다. 그래서 최종적인 점검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 된다고 간단하게 생각했었다. 적어도 처음의 심정은 그랬었다.

  하지만 생각만큼 의도한데로 풀린 게 아니었다.

  몇 개월 동안 잊고 지냈던 프로그램을 다시 처음부터 검토하기에도 벅찼고 그것이 조금은 익숙해질 정도로 밤을 지새면서 짐작이 갈 정도로 바뀌게 된 것이다. 아마도 이런 수동적인 자세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프로그램은 도저히 진도가 나가지 못했다. 거기다가 밤새 새로 구성시킨 내용이 전에 있던 지금까지의 내용보다도 더 상황이 좋아지지 않았다.


  PLC 프로그램이 발전을 한 것일까? 전에는 C 언어로 구성하였을 영역까지 넘어오게 되면서 실직적으로 전문작업자들만이 아니고 조금만 지식을 습득하게 되면 일반적인 작업자들도 간단한 프로그램을 쓰고 고칠 수 있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웠다. 그토록 힘들게 찾아 다니고 연구하였던 서보모터 제어가 간단하고 손쉽게 PLC 만으로도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 자신의 노력이 결실을 맺기까지의 동기 유발이 중요했다. 그가 사업적으로 그동안 노력해 왔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처지에서 마침내 성공을 하게 한 깃점도 이 시점이었으니까?

  또한 이런 변화는 자연스럽게 일본에서 넘어 왔다. 그전에 Z-80이라는 8비트 롬라이트를 C언어로 구성하여 넣어 주워야만 했던 번거로운 작업에서는 어림없었던 새로운 변화를 대기업에서 일본과 같은 계열의 PLC를 개발하여 판매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내용을 자체 A/S 팀도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


  삼성성결교회.

  웅장한 초 현대식 건물. 그 앞에 드 넓어진 주차공간. 교회는 골목을 끼고 한참을 들어가서 세워져 있던 초기의 모습에서 편도 6차선의 대도로변까지 부지를 넓혀서 주차공간으로 사용하는 가장 현대적인 교회건물로 바뀌어 있었다.

  그는 우연찾게 자신이 학창시절에 다니더 교회를 근처까지 오게 되었다. 새벽의 기운이 느껴졌다. 아직 예배를 보기 전의 교회는 분주함도 없었고 내부에 이르러서 1층 주차장까지 차량이 들어서지 않아서 걸어서 다녀도 전혀 지자잉 없었다. 그리고 차량을 1층과 그 앞의 3000평에 가까운 주차장을 가로질러서 중앙으로 이르는 2층 계단까지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는 호화스러운 면모를 과시하였다.  

  교회 종탐은 비틀린 아아치 형태의 깍아지른 절벽 모양으로 한바퀴 회전을 한 것처럼 비틀려서 20미터 높이로 대형 탑을 이루웠다. 그리고 그 가장 꼭대기에 십자가가 걸려 있었는데 그 위항이 하늘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는 커다란 높이의 웅장함을 거꾸로 형상화 시켰다. 그가 가장 우려했던 시골 종탑과 도시 종탑의 비교를 하던 내용으로 시를 썼던 기억이 다시금 떠올렸다.


  그는 자신이 학창시절에 쓰던 내용의 시와 수필을 회보에 실어 놓곤 했었다. 사실 자그마한 교회(그당시)에서 학생회의 회보집이라는 건 보잘 것 없었다.

  고등학교 2학년 시절에는 토요일 야간의 학생 예배를 보게 된다. 그런데 2학년 생들 중에 한 명씩 사회를 보게 되어 있었다.

  사람이란 자신만을 돌아보게 되는 것보다. 남을 위해 앞서 지도자가 되는 행동이 무척 고무적이고 인지능력에 도움을 주는 경우가 종종 있는 법이다. 그 당시 완벽하지 않은 진도에 의문을 갖고 부족한 자의식에 대한 성찰과 충동적인 면모를 갖고 있넌 내 모습을 볼 때 항상 불안한 심리 상태였었다. 그건 가난한 가족력과 장남으로서 가족에게 대한 자신의 위치 성찰로 인하여 한마디로 완벽하지 않은 쫒기는 자기성찰에 대한 끊임없는 불안심리를 갖고 있었다. 한마디로 불완전한 존재.

  언제나 튀어 오를 것을 기다리는 용수철 속에 재어진 실탄처럼 튀어 나갈 수 밖에 없는 존재적인 가치로 밖에 파악할 수 없는 불완전한 인격체였다.

  전혀 미래에 대한 예고도, 예견도, 완성도도 갖고 있지 못하였다. 안개속을 걸어가듯 암울했고 앞을 볼 수 없었다. 자신의 직업관도 없었다. 또한 대학교에 대한 진로도 갖고 있지 않았다. 오로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하는 게 가장 유용했는데 이 당시 내게 가장 위안을 준 여자가 있었으니 그녀는 목사 아들의 여자 친구인 A였다. 그리고 그녀의 여동생을 그는 불타는 욕망으로 크리스마스 이브날 바라보던 기억을 해 냈다.

  그렇지만 그녀의 집이 커다란 공장이었고 재산이 많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끌린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증명할 수는 없었다. 그는 다시금 자신을 저 발치에서 바라보고 사모하는 듯한 또 다른 여성을 의식하였는데 그녀는 자신보다 두 살이나 어린 다른 곳(다른 공장을 운영하는 사장의 딸)로서 어쩌면 B라는 여성보다 더 윤택한 삶을 가져다 줄지도 모를 것이라는 생각으로 결국에는 마음이 바뀌었는데 그건 이상하게 변모되고 변질된 자신의 이기주의에 기인하는 본연의 심리를 꿰뚫고 있었다.

  지금에서야 비로서 자신이 얼마나 무모하리만큼 상상적인 사람이면서도 마음을 잡지 못한 체 나비처럼 이꽃 저꽃을 마음을 잡지 못한체 날아 다녔다고 생각이 들 정도였다.


  A, B, C 의 세 여성 외에 D 라는 여성이 한 명 더 있었는데 그녀는 자신의 윗집에 살았다. 그렇지만 같은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마음이 가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녀의 모친이 장사를 하는 가난한 집안의 딸이었고 자신과 마찬가지도 별 볼일 없는 가정형편으로 얼굴까지도 못생겼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좋게 보지 않았는데 사실은 그렇다고 외면할 정도는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아무래도 그녀를 만나 보고 싶다는 신념이 가득하지만...

  그것을 그는 지금까지는 잊고 살았었다.  





8. 부산 웅상에서 돌아오는 길은 열차를 이용하지 않았다.

  지하철 노포동역에서 D.U 사모가 승용차를 갖고 나왔는데 올라 타면서 출발을 하면서 묻기를,

  “무얼 타고 왔어?” 한다.

  “열차 타고 왔습니다. 새벽 5시 30분에 옥천역에서 무궁화호를 탔습니다.”

  “버스가 편하지 않나요?”

  글쎄요? 타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친정집이 김천인데... 버스를 타고 갑니다."

  "아, 김천이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차를 갖고 오지 않으셨는데...”

  “이렇게 다니는 게 편합니다. 운동도 하고...”

  나는 가급적이면 많은 거리를 걸어서 다니려고 한다. 그래서 열차건 차를 타고 가지 못하는 곳은 걸어서 갔는데 어느 때는 5 km를 걷기도 했다. 물론 왕복 코드다. 대부분의 경우 공장은 외각진 곳에 위치하여서 걷지 않으면 안될 경우가 많다. 버스 타는 곳까지는 도착을 하여 택시를 타기도 하지만 돌아 올 때는 걸었다.

  택시를 타는 것은 특별한 경우이고 대부분은 걸어 다녔다. 그 이유가 운동을 위해서였다.

  부산에서 노포동 고속, 시외버스 터미널이 위치하고 있었지만 그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 이유는 전에 명륜동에 고속버스터미널이 위치하고 있을 때만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은 노포동에서 대전가는 우동 고속버스를 타게 된다. 12시 30분에...

  이처럼 때론 버스를 타고 갈 수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예전의 습관을 버리지 못한다.

  마침 거래처의 사장 부인이 내게 앞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면 버스로 갈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 경우 어떤 차이가 있던가!

  나는 보란 듯이 열차를 이용하지 않게 된다. 그들 KTX의 횡포로부터 벗어나서 새로운 이동 수단을 찾게 된 사실을 무엇보다 고소(맛)하게 여길 수 있었다. 그건 계속하여 무궁화호를 타다보니 어떤 경우 4시간을 기다려서 차를 타는 경우까지 발생하곤 하였는데 순전히 열차 배정을 하지 않는 한국철도의 부당한 횡포 때문이었다.

  앞서 그런 몰지각한 사고(思考)를 당하여 내가 집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늦은 시각이었는데 그 불편함은 형용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른다.


  그렇다면 오늘 내가 고속버스를 타고 가면서 얼마나 시간을 절약하였을까?

  이점이 가장 중요하다.

  만약 내가 노포동에서 무궁화호 열차를 타기 위해 다시 지하철을 타고 부산역으로 거꾸도 돌아 갈 테고 그곳에서 무궁화호 열차표를 끊게 될텐데 마땅한 시간이 없을 경우(그 시간대에는 전혀 열차표를 구할 수가 없었다) 4시간이나 대합실에서 기다리는 무자비한 횡포를 겪어야만 했다. 집에 도착하게 되면 오후 5시를 훌쩍 넘기는 게 다반하였다. 그전에 대구에 갔을 때도 그랬던 것처럼... 이런 무자비한 횡포를 이제는 고속버스로 전환하면서 바꿀수도 있을 것같다. 하지만 역시 야간에는 힘들 것이지만 가급적이면 첫 차를 이용하는 방법을 찾아보자!

 

  우리나가 국영기업인 한국철도공사의 무지막지한 횡포.

  새역사(驛舍)니 하면서 대규모의 시설을 투자하면서 완공한 대도시에 속한 건축물이 초 현대식(유리로 온통 장식한 건물이 초현대식이라니, 지나가는 개도 웃겠다)으로 신출하면서 어머어마한 돈을 빌렸고 고속철도를 도입하면서 진 빚, 또한 이미 상상 초유의 액수(천문학적인 규모의 빚)여서 이자가 새끼를 쳤고 매출에서 보전할 수 없는 한계치에 이르게 될 지경에 그야말로 그 방만함은 눈을 뜨고 지켜볼 수 없는 지경이라는 것은 코흘리게 어린애도 알 수 있을 터였다.

  철도 노조의 집회로 인하여 교통대란이 이르기도 하는 오늘 같은 사태가 누구의 잘못인지 가릴 계제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내걸기 시작한 횡포가 결국에는 소비자를 우롱하는 처사에까지 번지고 확산되어 이제는 횡포에까지 이를 지경이었다. 중요한 점은 고속철도의 도입으로 저운임으로 분산되는 승객들을 고속철도로 돌리느냐? 하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지만 나는 지금까지도 단 한 번도 고속철도를 탄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보다 중요한 점은 그들이 무궁화호 열차의 증편을 취하지 않고 객량을 6량으로 국환하면서까지 계속 입석표를 끊는가? 하는 점이었다. 그것이 주말에는 너무도 매진이 많이 일어나서 순전히 입석으로 승차를 할 지경이었지만 그 누구도 객차수를 늘리고 싶지 않아 하는 듯싶었다. 열차 시간표도 오후부터는 전혀 없었다. 4시까지도 꼬박 기다려야할 지경이었으며 그것이 이 바쁜 현대 생활에서 얼마나 가치있고 소중하며 손님을 위해 서비스의 질을 개선하려는 노력이 전혀 없는 자세에 기인하고 있다는 사실에 상실감과 분노를 자아내곤 했었다. 얼청난 스트레스를 무릅쓰면서 국철에 대한 반감과 분노를 갖게 되었는지 이루 형용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서비스의 질을 개선하려는 의지가 없었고 순전히 고속전철 이용승객을 위해 편의를 제공하고 몰아 대는 암암리의 태도. 아무래도 그것은 태도라기보다 갖은 자의 횡포이며 무의식적인 폭력이었다.

 

  보라, 너희들이 아무리 기를 쓰고 기고만장하여도 다른 대안을 강구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더 빠르고 유용한 수단.

  고속버스를 이용할 것이고 조만간 전기 자동차가 도입되면 하루아침에 몰락할 수도 있을 그런 교통대란을 불을 보듯 뻔하게 지켜보는 심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는가!


  내게 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심리적인 압박을 느끼면서도 한국철도에 대한 분노에 치를 떨어야만 했던 굴욕의 시간이었다. 역 대합실에서 느끼는 수많은 시간의 낭비를 나는 지접적으로 거론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때마다 노트북 컴퓨터를 꺼내들고 글을 쓰곤 해 왔으니까? 적어도 시간적인 낭비를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출장를 자주 나가야만 하는 내 처지에 있어서 열차를 이용하는 건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불합리하고 불편함은 가중되어 왔었다.

  그것이 내게 이른 것이 아니고 아내와 함께 고통을 동반할 때마다 더욱 괴로웠다. 몇 개월 전에 아내를 영등포역으로 컴퓨터를 갖고 오라고 했을 때에 그렇게 많은 시간을 허비하며 발을 동동 굴러야 하였던 적이 있었다.

  이것은 현대인에게 맞지 않은 처사이기도 했다. 적어도 질좋은 서비스로 이용객을 상대하여야함에도 불구하고 후퇴를 하고 몰지각한 후진성을 보이는 낙후된 작태. 그것은 한마디로 가진자의 횡포를 국영기업인 철도청이 내건 위상이었다.  


  작년만 해도 철도노조의 파업이 극에 달하여 무려 8시간이나 발이 묶인 적도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지금도 그런 불편함이 자행되어 시간적으로 열차 배정의 증편을 하지 않는 이유가 불과 6량의 객차를 가지고 많은 승객을 운반하여야하는 무궁화호의 운행에 대한 천편일륜적인 방법은 기준 미달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불편함을 겪게 함으로서 자연스럽게 고속전철로 분산하기 위한 효과를 얻기 위해서라면 성공하였다고 할 것이다.

  적어도 나 같은 사람은 수궁하지 않고 계속 버틸 것이며 다른 대안을 찾겠지만...


9. 부산에서 대전까지 가는 우등 고속버스는 30석 만석으로 매진이었다. 우등고속버스의 요금은 23,300원.

  그전 같으면 이 요금이 비싸다고 생각될터인데 나는 그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물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가게 된다면 훨씬 더 저렴할 수 있었다. 옥천에서 부산까지 16,800원을 타고 갔으니까? 6,500원이나 더 요금이 비싸다. 하지만 서로 다른 면을 비교해보자! 우선 시간적인 절약을 가장 우선으로 쳐야만 했다. 노포동에서 대전 고속버스터미널까지 3시간 정도가 소요되었지만 만약 부산역까지 간 뒤에 열차를 타게 되면 그보다 갑적이나 더 시간이 경과될테니까!

  시간적으로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야만 했다.

  아침에 출장을 나가면서 아내에게,

  “오늘 물리치료나 받아!” 라고 말했는데 그 이유는 하루 쉬라는 뜻이었다. 마땅하게 할 일도 없었다. 모두 내가 먼저 가공을 한 뒤에 넘어가야할 후처리 공정들이었다. 물론 할 일은 많았지만 1차로 선반, 밀링 가공을 하여야 하고 2차 작업과 공정이었다. 그런데 여자인 아내가 정밀도가 있는 작업을 하지 못하여 공장이 하루 쉬는 것이다.

  전 같으면 용납하지 못할 정도로 흥분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나조차 계속하여 출장을 나가게 되었는데 3일째 연속이었다. 오늘은 부산 출장, 어제는 왜관출장, 그리고 엇그저께는 자동차 검사를 받았었다.


  엇그저께 자동차 검사를 받는 것은 오전 중에 차량의 앞바퀴를 뜯어서 부레이크 패드를 양쪽 모두 교체하였고 점심을 먹고 난뒤 검사장에 갔다온 뒤로 통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또한 그 여파로 잔업도 하지 못하였고...


  오늘까지 3일째 전혀 성과없는 출장으로 인하여 공장에서 할 일은 스톱상태가 된다.

  물론 이런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는데 그렇다고 공장에서 하는 일이 쉴 정도는 아니었다. 아내 혼자서 작업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를 해 둔 상태였으니까? 그렇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를 못하였다. 


10. 오후 3시 28분. 대전고속터미널에 도착한 직후 다시 옥천가는 시내버스에 탑승한 상태다. 적어도 2시간 정도는 절약을 한 것같다. 무엇보다 빨리 오게 됨으로서 얻는 시간적인 이익이 돈으로 환산하자면 수 십만원 정도라고 할까?

  하지만 돈으로 바꿀 수 없는 정신적인 풍요로움이다. 철도를 이용하지 않았다는 자부심. 그리하여 한국철도의 저변에 서민을 향한 조그마한 이해심(?) 분별력(?), 도리가 있을지라!아멘!(이런 경우 큰 소리로 아멘이라는 교인들의 함성이 이어지는 게 어떨까? 하는 심정이다)


생각해보면 많은 부분에서 인간적이지 않은 부분이 그럴듯하게 포장을 하여 마치 가장 양심적이고 지적이며, 국민적이라고 목소리를 높여서 최고라고 일컬는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만한 진신성을 가지느냐? 고 따진다면 결국에는 어느 누가 토을 달아서 옳고 그름을 판단할것인가! 그런 잣대를 대고 마음대로 사람을 평가하고 정의를 내린다면 결국에는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해서 확신을 내리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좋지 못한 관행과 자세는 언제가는 사회적으로 외면을 당하기 십상이다. 부도덕하고 의리가 없으며 비정상적인 수단, 편파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들은 법에 그 잣대를 들이된다. 법을 이용한 과대망상은 인간적인 기본까지도 잠식하고 만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법과 현실의 비현실성. 괴리가 얼마나 인간을 극한으로 몰고 갈 수 있는가!

  사실상 법망을 벗어난 공공연한 사회 무질서를 논의하는 건 아니다. 다만 이런 불 유쾌한 여러 가지 정황을 보면 사람들은 결코 법을 좋아하지 않는 것같다.


  삶에 거추장 스럽기 때문이다. 법을 지키면서 곧이고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결국에는 외면을 당하게 되는게 그것은 서민적인 사람들이 얼마나 고통스럽게 억압하고 자유스러움을 박탈하느냐? 하는 애궂은 수단의 하나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불편함과 억압에 대한 정부와 관공서에 대하여 과감하게 분기하려 들지 않는다. 북한의 경우도 벌써 독재자가 3대째 최고 권력기관으로 승계를 물려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것만 해도 그렇다.

  하지만 전체적인 발전을 저해하는 후진성을 모면할 수 없었다. 국가경재의 존망이 기로에 서게 되는데도 불구하고 가난과 비참한 생활로 국민들이 핍박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독재주의자들은 살찐 돼지처럼 자신의 부를 이룩하고 그것에 가치를 추구한다. 그럼으로 인하여 국민의 자유가 박탈당하고 전체 경제가 극심한 적자의 늪에 허덕임에도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폐쇠적이고 가난하며 이기주의적이라고 외면을 당하게 됨으로 얻는 이익에 든하시 하는 손해를 감당하려 들지 않는다.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부도덕과 독재자의 일방적인 권위의식에 연유된 국민의 자유와 삶이 유린당한 사례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자유주의 적인 사회에서 그런 거짓된 모습이 만연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적어도 국민을 우롱하는 국연기업들이 얼마든지 존재하며 그로인사여 서민들이 겪는 고충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지경이되어도 누구 하나 책임추궁을 당하지 않는 것이 이 거대한 군락지의 행태였으니까?


  사람들은 자유주의에 대한 이상과 현실에 의문을 건다. 그것은 결국에는 전반적인 사회에서 드러나는 모순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기도 하는데 그런 점에 있어서는 적어도 개인적인 생각으로 국환되어 있을 뿐이다. 그것이 일찍이 없더 것이 아니고 전부터 곪아 터지고 만연되어서 느끼지 못한 상태로 억압되고 인식되어 왔을 뿐이다. 그 상처를 도려내고 수술할 수 있는 의사가 등장하기에는 너무도 사회에 모순이 흘러 넘쳤고 아픈 부위가 썻어서 더 이상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단계에서까지 진동하는 악취와 고통의 상황속에서도 서민들은 참고 견디게 된다.

  얼마나 편협된 사회적인 모순인가!

  그렇지만 일찍이 우리들은 국가 재절이 파탄으로 치닫고 IMF의 사태를 맞이하게 되었었다. 그리고 지금 그 때의 절망적인 생활을 벗어났다고 생각하고 극복하였노라로 떳떳하게 말한다.

  하지만 여전히 국가 부채는 높았다. 오히려 IMF 시대보다 더 많은 국가 채부를 짊어지고 가는 허덕이는 국가. 그리고 그 안에서 언제나 구영기업들에게 아사상태로 시달리는 서민들. 한마디로 어항 속에 갇힌 물고기 신세와도 같았다. 그토록 국가 재무가 최악으로 치닫을 때조차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알리지 않다가 결국 파산신청을 하였었다.



  신기하게도 그 모든 게 방만한 국영기업이 사회에 부담을 떠안기는 중심에는 빚으로 얼룩진 방만한 정부가 있었다. 과도한 빚, 무리한 투자, 그리고 마구 빌려다 쓰는 국가 채무.아이러니 하게도 역대 대통령들보다도 새로 부임하는 대통력의 통속에 의심하는 부분이 있었다. 역대 최고의 채무를 빌려 썼다는 대통령의 빚잔치. 계속하여 빚을 지고 그 이자를 다시 채무로 변통하였다.



11. 생각만큼 잘 살 수 있는 게 아닌 현실에 직면하여 왔던 내 인생. 그것은 결국에는 직장 생활을 아무리 하여도 절약과 절재를 하기 전에는 적자를 면치 못한다는 우려와 일치한다.


그것이 사회에 뛰어들어서 직장 생활을 시작하는 젊은 시절의 내 모습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나는 결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내 어머니도 그렇게 생각하였을 터였다. 가난을 면치 못하던 시절에는 생계조차 힘들었는데 그것은 어머니 혼자서 생계를 꾸려 나가야만 했던 우리집의 생활구조에 대한 장남으로서의 내 생각이었다. 한동안 나는 내가 갖고 있는 젊음에 대하여 추호의 의심읗 하지 않았다. 그것이 내가 갖고 있는 전부였으니까?

  그리고 훌연히 결혼을 하고 지금의 아내를 얻었느넫 그 뒤부터는 내게 봉급의 수령자는 어머니에게서 아내로 바뀌었다. 남자로서의 의무감. 그것은 직장 생활을 하고 돈을 벌어다가 아내에게 주는 것으로 최고의 행복이라고 여겼던 것인데 이 생각은 지금이나 예전이나 다를바가 없었다.

 

  하지만 개인사업을 하게 되고 수입이 일정치 않다보니 함편으로는 똑같은 액수로 생활비를 줄 수 없었다. 직장 생활과 다르게 개인사업은 변모된 양상일 수 밖에 없게 된다. 기준적인 수입의 차이를 갖게 된 이유에 대하여 사회 적응력의 차이로 변화무쌍한 외부 요인에 대한 인식불가, 적응력 부재, 미래에 대한 투자의 실패, 연구부진 등을 꼽을 수 있었다. 그론 인하여 최악의 적자를 보전할 수 없게 될 경우 개인파산이 되고 만다. 여기서 가장 큰 성공의 보장성은 역시 노력이었다.

  자신이 하고저하는 진취적인 기상과 의욕에 열의를 갖는다면 그것이 발판이 되어 조금씩 회생의 도약을 마련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노력의 일환에 있어서 결국 가장 큰 부단이 되는 건 기술력이기도 했다. 세계에서 제 1인자가 되는 게 그만큼 힘들다는 사실을 절감한다면 조금은 자신을 뒤돌아 보라!
그리고 조금만 한 발 양보하라! 어쩌면 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큰 핵심은 먼 곳에서 도는 게 아니고 자기의 내면속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순간에 날개를 달 수도 있지 않은가! 비상하는 순간을 위해 그만큼 피나는 노력을 할 수 있다는 자체가 비고소 깨달음의 진리가 될터이니까?


12. 옥천에 도착할 때까지 노트붃으로 글을 썼다.

  아침에는 열차에서,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는 고속버스와 시외버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