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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리눅스 서버... 일기(1) (日記)
하지만 기계 제작 일이 계속 주문이 들어와서 밀려 있는 상황. 조금 더 야간 잔업을 진중하게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 그렇지만 겨울철이다보니 너무 추워서 또한 야간 작업이 힘들었지만 이제 봄부터는 더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계속된 기계 주문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을 더 많은 시간을 기계작업시간으로 충당하여야만 한다는 점이었다.노래 녹음에 대한 견해 2025. 7. 1
2025.09.02 21:57
6월 28일(토), 29일(일). 양 이틀간 증평 동호회 탁구 경기에 나갔다 왔고 어제 30일(월) 저녁에는 동이 탁구장에 갔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탁구에 대한 열성적인 모습을 비춰 보인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디지털 카메라를 갖고 가서 영상 촬영을 하게 되면 그것을 다시 편집하여 동영상을 유튜브에 올리게 되는데... 여기에 더해 노래를 불러 녹음하여 메인 음으로 넣어야만 했습니다. 이번에 곡은 만남, 바램, 고맙소라는 노래입니다. 어떻게 보면 유튜브에 올리는 영상이 모두 노래를 부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노래에 꽂힌 것일까요?
338. 이번에 증평가서 찍은 동영상과 사진과 편집하는 중이다. 그렇지만 기계 제작 일을 낮에는 하면서 시간을 할애할 수 없었으므로 조금씩 진행 중이다. 모두 3편이었고 그것을 다시 노래 녹음과 함게 동영상으로 편집하게 된다. 그렇지만 노래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으니...
이틀 동안 증평 탁구장에 갈 수 있었던 건 앞에 기계를 전북 익산으로 납품했기 때문에 여유가 있어서였다. 그렇게 바쁜 와중에 이제 다음 기계를 고려하게 된다. 그래서 7월 178닐 까지 납기가 걸려 있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농사 일도 해야만 했다. 비록 멧돼지로 인해서 감자를 심어 놓은 군서 농사가 망치긴 했지만 이제부터가 문제였다. 후반기 농사일이 남았다. 군서 산밭에는 들깨를 심을 것이고 청상의 밭에는 검은콩과 역시 들깨를 심게 된다.
오늘은 노래 녹음에 관한 걸 기술하기 위해 나왔다. 그것에 집중해서 쓰고저 하는 건 그만큼 지금의 내 생활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사실 시간적으로 부족한 환경이다. 전혀 고려되지 않는 대상이었고... 무려 35년을 거슬러 올라가야만 하는 세월. 스무살 즈음에 노래를 키타로 부르면서 지냈었는데 28세 때 결혼을 한 이후 전혀 그러지 못했었다. 먹고 사는데 급급했던 직장 생활과 그 뒤, 자영업의 순탄치 않는 험난한 여정. 이건 사업적인 시기에 죽느냐? 사느냐? 의 기로에 선 운명의 기로에 서서 전혀 노래를 염두에 두지 못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문학에 대한 꿈도 접었다.
소설가와 가수의 두 가지 꿈. 이 중에 어떤 것도 내 생활과는 밀접하지 않게 되었는데 그건 기계제작이라는 자영업을 시작한 뒤, 너무도 금전적으로 힘든 과정을 겪으면서 계속하여 기계를 연구하는 일이 고배를 마시게 된다. 무려 아홉번이나 실패를 거듭한 것이다. 그것으로 인하여 전혀 생활의 기반이 잃고 엉망으로 바뀐다.
이때의 과도기의 시기를 가장 비참하게 표현하는 용어는 실패의 거듭으로 인하여 사업의 존폐 기로에 서게 되어 실낫같은 희망을 향해 그나마 조금씩 운명의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너무도 절망적인 삶이었다. 이때 아내는 집에서 두 아이를 연년생으로 낳고 기르게 되었는데 산부인과에서 낳은 병원비조차 치를 수 없었다. 그래서 처형에게 빌려 써야만 했었고... 이때의 나의 모습은 과도기의 최악의 상황이라고 여겨진다. 운명의 구렁텅이속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는 그야말로 절대절명의 최악의 경우. 이때를 나는 암흑기라고 보았다. 한치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그야말로 돈이 없어 계속 빌려가면서 기계 연구를 했던 마지막 도전. 그러나 여덟 번째도 실패. 이제 아내가 만류했다.
"이제 그만 둬요! 계속 실패만 보는데 무슨 기계를 다시 만들 것이며 무엇으로 생활하죠! 언니에게 돈만 잔뜩 빌렸는데... 그걸 언제 갚고..."
이렇게 절망적인 반대를 하였었다. 그도 그렇 것이 우리에게는 계속 돈만 들어 갔지 벌지믄 못했었다. 기계를 연구하여 납품을 하는 족족 다시 실패를 하였다. 부산, 서울, 김천(김천의 태신상사라는 곳에 납품을 했다가 다시 실패. 그리고 그곳에 계약금 50만원 돌려 줘야만 했는데 사장이 안 줘도 된다고 했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뒤, 그곳 사장이 사업을 접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80만원의 돈을 송금해 줬다.)
이처럼 어렵게 꾸려 나간 그 시기. 돌이켜 보면 그 당시 너무도 어려운 상황에 대하여 아내가 두 아이를 키우면서 잘 참아 줬다는 게 무척 가슴에 남는다.
어쩌다가 아홉 번 째 기계를 서울** 이라는 곳에 처음 납품하여 성공을 하였는데, 이 당시 사장은 내게 남은 잔금을 현금으로 줬었다. 그 돈을 갖고 서울 김포에서 지금의 옥천까지 내려오는 동안 차 안에서 얼마나 기뻤는지... 형용할 수 없는 이 감격은 언제나 생각해도 너무도 빛났다. 마치 진흙 속에서 보석을 찾은 것처럼...
시간이 없어서 다음을 예고하면서 끊어야 할 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