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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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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대 병원에서...

2017.01.10 19:56

文學 조회 수:108

 2017년 1월 10일 10시 50분.

 충대병원 피부과 대기실 의자에서 이 글을 쓴다. 

  사실상 모친과의 유대 과계에 대하여 이렇게 깊이 연관짓는 건 그만큼 자식으로서의 도리였다. 그러므로 작고하기 전까진 계속하여 부름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내 입장은 어떻던가! 무조건 요양병원에 모친을 모시고 나만 살겠다고 달아나지는 않았던가! 또한, 나만 호의호식하지 않았던가! 불쌍한 우리 어머니는 아무도 찾지 않는 요양병원에서 혼자서 가족들에게 버림받기라도 한 것처럼 매일 슬프게 울부짖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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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에 타고 두툼한 옷으로 포장을 한 것처럼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모친의 모습- 

 

요양병원에 모셔 놓고 지금까지 아내만 한 달에 두 번씩 보냈고 나는 일 핑계로 잦아가지 못했었다. 이런 상태로 근 1년간을 보내면서 그동안 못뵈었던 것을 오늘 실컷 옆에서 함께 충대 병원 피부과 진료 대기실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관계를 지금까지 모르고 지내게 되었다는 사실은 아마도 나를 그만큼 편안하게 지냈다는 사실을 놓고 보면 죄스러울 뿐이었다. 오른쪽 다리와 오른쪽 팔이 굽어서 잘 펴지지도 않을 정도고... 이런 과분한 처사. 모친만 요양병원에 보내 놓고 나만 호사스럽게 보내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잘먹고 잘싸고 있으면서 과연 어떻게 자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면서 마음 속으로 목놓아 울어 본 들 그게 무슨 소용일까? 

  모친이 옆에 없었으므로 그만큼 현실에 와 닿지 않는 예전의 1년 동안 간병을 했던 게 모두 지나가 버린 추억처럼 와 닿을 정도였다. 한마디로 그 때와 비한다면 너무도 분수 높은 생활이었다.  


  생각이 모친에게 꽂히지 돈안 나는 그만큼 야박하게 굴었던 내 마음이 너무도 슬퍼졌지만 남자이기 때문에 마음 놓고 울지 않으리라! 다짐을 해 왔던 지난 세월의 무게.

  모친은 82세였고 나는 이제 58세였다. (나와 24세의 연배)

 그동안의 자유. 그것은 분에 넘치는 사치였다. 내 몸에 둘러 붙어서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것 같은 혹과 같았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모친은 요양병원에 보내놓고 나만 자유롭게 여유를 만끽하고 있지는 않은가!

 어쩌면 이 부담감에서 해방되려고 요양병원에 모신 것은 아니었을까? 그만큼 불효가가 된 기분을 어쩌지 못하면서 내게 주워진 사명감을 떨쳐 버리게 되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모친을 데리고 충대 병원에 함께 진료를 받으면서  그 동안의 잊고 지내던 인식을 다시 한번 깨우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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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서 진료를 끝내고 집에 돌아와서 새로 이사한 집을 2층까지 모친을 안고 계단을 올라 왔다. 어짜피 점심을 먹기 위해서 중간에 오는 도중 깨죽을 사 왔고 그것을 드시게 한 뒤에 요양병원에 모시고 갈 참이었다. -


  아마도 탁구 동호회에 나가게 되면서 그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조차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느껴야만 했다. 이런 모든 사실들이 현실이 아닌 것처럼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모친을 접목시켜야만 한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을 극복할 수 없는 문제점)    


  욕창도 있고 앞으로도 더 힘들어 질 것이라는 의사의 말.

  "요양병원에 계신 어르신들의 경우 운동부족으로 면역력이 떨어지셔서 몸에 물집이 생기는 게 허다합니다. 이 정도는 그나마 나은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증상이 호전되지는 않을 겁니다. 나빠지시기만 할테고..."


  면역력의 결핍으로 인해서 다른 크고 작은 질병이 계속될 것이라는 예고이기도 했다.  모친이 갖고 있는 극복할 수 없는 노인질환은 비단 그 앞 전의 할머니가 똑같은 상태로 병을 앓고 계셨던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것이 이제 모친에게 다시 되돌아 온 것이다. 거동이 불편해진 것과 함께 지속적으로 가해오는 의무적인 자식으로서의 의무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불편함을 감수하였을 터였다. 여기에서 엄청난 파장과 함께 계속되었던 병원에 입원한 뒤의 간병을 치루웠던 과거의 경우처럼 지금은 그렇게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 사실상 모친과의 유대관계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는 생명력을 지속하고 있는 한 계속되리라는 점이었다. 이런 사실은 모친이 거동이 불편해짐으로서 병원에 입원해 있게 되고 간병인을 쓰지 않게 된 사실 때문에 가족들이 한 번씩 돌아가면서 간병을 해낼 수 밖에 없었다. 이 점을 이유로 모친에 대한 자식으로서의 의무감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부담을 떠 않는 사람은 대부분의 경우 책임감이 더한 큰 자식이라던가 부담을 떠 안을 수 밖에 없는 극단적인 이유가 상존한 경우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내가 장남으로서 모친을 모시게 된 점은 기정 사실로 받아 들일 수 밖에 없는 결과가 되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서 부담감은 떨쳐 버릴 수 없는 막다른 길로 들어 섰다. 모든 게 그로 인해서 뒤바뀌어 버린 형국. 모친과의 양보 없는 봉사를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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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암동 죽을 파는 곳에서 사 갖고 온 깨죽을 맛있게 드시는 모친을 모습. 등이 굽어서 뒤에 이불을 받쳤다. 오른쪽 다리는 펴지지 않았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펴 놓았는데 처음에는 이런 상태도 아니었다. 발 끝이 엉덩이까지 굽어져서 펴지도 못하는 상태로 옷을 입히기도 힘들 지경이라고 간병인이 말했었고 아침에 나올 때도 발을 조심하라고 간호사들이 주의를 주웠지만 가급적이면 곧바로 펴야만 했으므로 1톤 화물차와 휠체어에 태워서 다닐 때는 그렇게 된 상태로는 이동이 불가능하여 어짜피 다리가 아프다고 성화였지만 짐짓 모른 체 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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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이사한 집에서 이제 우리는 1년이 가까웠지만 모친은 한 번도 와 보지 않았으므로 오늘 모처럼 모셔오게 된다. 그리고 죽을 대접하였는데 스스로 수저를 떠서 드시는 모습이 정상인과 다를바 없었다. 처음 와서 한 일은 1회용 기저귀를 갈아 드리는 것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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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는 스스로 고개를 들지 못하셨으므로 내가 머리를 뒤로 젖히고 사진을 찍는다. -


  내 생명을 낳아주신 어머니 어떻게 해서든지 오래 살기를 바라지만 그렇지 못한 모습이 안스럽기만 하다. 그리고 요양병원에 다시 모셔다 드렸고 나는 하루를 <기계 제작 일>을 하지 못한 체 공쳤지만 그로인해서 모친과 해후할 수 있었음을 고마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