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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혈압과 어지럼증

고혈압은 불치병이라는데...20년을 되 찾은 느낌이든다. 고혈압 약을 복용하기 시작한지 20일만에 끊었다. '한 번 약을 먹기 시작하면 평생 끊지 못한다는데...' 그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전혀 효과가 없었으며 대신 20년을 늙게 만들었던 약에 대하여 나는 목숨을 담보로 생각하고 끊었다. 그리고 나서 오히려 달라진 인생을 나는 누구보다 기뻐하고 있다. 그 20년을 덤으로 되찾아 놓고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하여 새로이 생각한다. -본문 중에...- 120-80이 정상혈압

병원에서... (8) 어디보자, 내 얼굴 (2)

2009.08.20 21:53

文學 조회 수:2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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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8. 20일 수요일

 

1.이틀간 일을 하지 못했는데 그 여파로 NC 기계를 더 늦게 할 수 밖에 없을 듯하다.

 

2. 어디가 아픈지 정확하게 병명을 내리지 못하면서 막연하게 또 그럴 것이라는 짐작을 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시한부 인생을 사는 것과 진배없었다. 어쨌거나 그게 내 운명이며 내 고질병이라고 달게 여기는 게 도리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그런 일이 아무 때나 일어나며 마치 간질병처럼 발작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나를 회안으로 저미게 한다.

  이상하게 버스를 타고 갈 때도 그런 멀미가 떠나지 않았었다. 아찔한 현기증. 그 현기증 뒤에는 끝도 모를 절망 속을 헤매는 것처럼 어지럼증에 시달린다. 그리고 결국에는 자리에서 앉지도 못하고 누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며 호전되지 않는다면 그런 상태로 이틀이나 갔다. 만약 여행 중에 그런 일이 생긴다면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져 눕고 말리라! 또한 겨울철에는 길에서 동사할 수도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 몸을 가루지 못하는 상태가 지속됨으로서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많은 고생을 할 수 있었다.

  집에서도 3층에서 1층을 내려가지 못할 정도로 몸을 가누지 못했었다. 신선한 공기를 마시자 멀미가 가라앉았던 버스에서 그답 내리지 않고 창문을 열어 놓고 코를 들이대며 숨을 쉬기도 했었다.

  그렇다면 이 병을 안고 살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3월 달에 응급실로 실려 갔던 병원에서 어떤 조치도 받지 못했었다. 불과 5개월 만에 재발한 극심한 현기증이 이마에 충격으로 맞은 상처로 인하여 피범벅이 되면서 조차 어쩌지 못하고 누워 있는 상황이 나는 극히 절망적이었지만 이것은 일각의 빙산이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감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3. 내 몸에 대한 피할 수 없는 어지럼증의 근원은 결코 유전학적으로 부친과 연관이 되어 있을 것이다. 체질적인 원인이리라!

  내가 군대 제대 후에 집에서 근거리의 양식기 제조 공장에 근무하고 있게 되면서 우리 집은 생활적으로 안정이 되었다. 그것은 구태여 지금까지의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토대가 됨은 물론이다. 내가 군대에서 둘 째 동생이 대학에 가겠다는 것을 만류한 이후 방위에 근무하는 중이라 아침마다 도시락을 싸들고 군대에 출근을 하는 게 무척 힘들어 보이는 둘 째. 세 째 동생은 이제 고등학생이었고 막내 동생은 중학생이었는데 부친의 무능력함으로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은 내가 부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양식기 공장에서 철저하게 충실하였는데 내게 있어 이때만큼 기계처럼 단순하고 반복적인 작업에 종사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가족에 대한 의무가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지대한 것이었으므로…….

  물론 초기에는 양식기 공장에 대한 호기심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그토록 몸담고 충실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가족에 대한 부양 때문임은 부정할 수 없었다. 어떤 이유 때문이건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은 공장과 집을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돌게 되는 것이며 아침 8시 출근하여 밤늦게 들어오는 것이 다반사요 철야를 밥 먹듯이 하면서 버틸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내게 그만한 젊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젊음을 나는 가족들을 위해 종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동생들은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엄연한 형 노릇이 부모에게서 받아야하는 의무인양 받아들였고 둘 째 동생은 나중에 배신을 하듯이 은혜를 저버리는 비틀린 성격으로 변하고 만다. 

  내가 스무 다섯 해 되는 겨울.

  몸을 겨울철로 접어들어서 단단하게 감싸듯이 입고 출근을 하였는데 찬기가 몸에 느껴지는 초겨울이었다. 공장은 언제나 어두운 밤에 퇴근을 했다. 해는 짧아져서 그 느낌이 더 했는데 아마도 공장의 캄캄한 분위기가 그런 기분을 더하지 않았을까 싶다.

  작업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반장이 찾았다.

  “집에서 전화가 왔다는데 부친이 쓰러지셨다는데?”

  “예!”

  나는 조퇴를 하고 집에 돌아 왔는데 모친은 부친을 데리고 이미 퇴원을 한 뒤였다. 내가 걱정을 할까봐 알리지도 않았던 모양이다.


  상황은 대강 이랬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난 부친은 화장실에 가려고 하다가 부엌에서 부치막을 넘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으며 의식이 없자, 모친은 한방병원에 가서 침을 맞고 했지만 언제 깨어날지 알 수 없었으므로 돈을 들이지 않기 위해 그답 퇴원을 했다고 했다.

  병명은 중풍이라고 했다.

  부친의 나이 불과 50이 체 되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그 뒤 절명을 한 72세까지 내리 20년을 풍으로 왼쪽 사지를 쓰지 못한체 지냈으며 하루라도 술에 마시지 않은 적이 없을 정도로 애주가셨다. 그리고 말년에는 결국 똥칠을 하며 지낼 정도로 방안에서 어린아기처럼 1회용 귀저기를 차고 있어야 했었는데...

  부친은 물로 뇌의 한쪽이 막히는 중풍 환자로 보낼 정도로 어려운 생활을 했던 것이다.  

 

5. 이틀 전에,

  나는 머리 속에 일어나느 현기증을 느끼면서 급기야 3월 20일에 있었던 그 공포의 현기증이 도졌음을 알았다.

  그렇지만 손님이 갖고온 깔대기 모양의 금형을 뾰족나온 부분을 22mm 에서 22.6mm 로 살을 붙여 주워야만 했다.

  처음에는 22mm 의 뾰족나온 부분을 20mm 로 잘 깍았다.

  그리고 20mm 쇠파이프를 그곳에 때겨 박은 뒤에 조금 튀어 나오게 그라인더 절단기로 잘라낸 뒤에 파이프 부분을 22.6mm 로 가공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다.

 

  아, 문제는 두 번째 작업을 시도하는 중에 선반머신의 척에 제품을 물고 회전 스위치를 넣은 뒤에 바이트를 끝부분에 갖다되는 순간,

  "탁!" 소리를 내면서 쇠덩이가 튀어나와 내 이마를 때렸던 것이다.

  그 순간 나는 머리에 맞은 쇠덩이의 감각이 그다지 둔탁하지 않으면서 아찔하게 느껴졌는데 아마도 상처를 입히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곧이여 이마에 흘러 내리는 액체가 있어서 오른 손을 집었더니 피가 흥건하게 묻어나는게 아닌가!

  '아, 다쳤구나!'

  그러는 중에 내 생각은 다행이 뇌속에 피가 터지지 않고 외부에 피가 터진 것에 감사했다. 아마도 좀전에 어지럼증이 시작되기 전에 나는 이틀을 어지럼증에 시달리며 지낼 것같은 절망감을 느꼈었는데 다행히 이마에 피가 터진 것으로 보상을 받을 수도 있으리라는 보상심리에 만족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피가 계속 흘러 내리자 무엇인가 지열을 시키기 위해 헝겁조각을 찾아야만 했다.

  사무실 안에 들어가서 새 장갑을 주겹으로 접고 이마의 상처 부위를 눌러서 지열을 시키려고 했지만 계속 실패를 하였으므로 피가 어느덧 얼굴에 흘러 내려서 더이상 닦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거울을 쳐다보지 않고는 상처 부위를 확일 할 수 없었으므로 사무실에 다시 들어가서 거울을 보자,

   이마의 중앙에 난 상처보다 왼쪽 눈가에 난 상처가 더 크게 입을 벌리고 있지 않은가!

  '아, 세상에...'

  그제서야 나는 상황이 겉잡을 수 없이 크게 일어 난 것이라고 깨닫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다시 밖으로 나가서 그런 몸으로 일을 끝내려고 하는 순간 앞서 일어 났던 현기증이 '띵!'하니 일어 났고 뒤이어 나는 그 자리에서 서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엎친데 덮친 겪인가! 어지럼증이 다시 시작되다니... 오, 하나님!"

  나는 그렇게 하늘에 있는 그 누군가를 찾았는데 그게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절망적인 절규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가지의 절망적인 현실에 나는 의지마저 꺽여 있었다. 너무도 비참한 현실이었다. 피투성이처럼 흘러 내리는 얼굴을 감싸안고 그 자리에서 누웠기 때문이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 신경을 타고 흐르는 충격파에 시달렸다. 머리 속에서 벌레가 꿈틀대는 것 같았다. 한 번 꿈틀대고 나면 온몸이 마비가 되는 듯한 통증과 함께 땅이 꺼져 버리는 것만 같이 느껴졌다. 그렇지만 의식은 또렷했으므로 무엇보다 다행이었지만 몸을 가눌 수 없었으므로 그 자리에 쓰러져 누워 버렸던 것이다. 그렇지만 맨 바닥이 아닌 기계 앞의 철판으로 만든 발판 위였다. 그만큼 맨 바닥은 누울 수 없을 정도로 깎아져 나온 쇳조각으로 뒤덮여 있었으므로 누울 수 없는 환경이었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그나마 철판으로 된 발판 위에 누웠던 것이다. 의식은 또렷하였지만 몸을 가눌 수 없는 상황이 얼마정도 지속되었다. 그러나 내 의식은 손님이 맞기고 간 제품을 가공하여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이미 한 번 가공이 되었으며 가공된 부분에 끼워 맞춰야하는 파이프를 뜨거운 산소불로 달구어서 오함마(일반적인 망치보다 크고 육중한 쇠망치) 질(때림)을 해서 박아 놓은 태로 선반머신(기계)의 척으로 물렸다가 빠져 나오면서 내 이마를 때렸으므로 온통 피투성이로 범벅이 된 얼굴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누워 있는 상태로 계속 있을 수가 없었다. 눈을 뜨고 떨어져 내린 제품을 찾았다. 내 머리를 갈겨버린 깔때기 모양의 쇳덩이는 멀쩡하게 바닥에 놓여 있었다. 그 옆에 안경도 함께 있었으므로 우선 안경부터 안전한 곳에 놓고 가공하려고 하던 물건을 집어 들고 선반의 척에 물었다. 이번에는 세 개의 구멍에 핸들을 끼우고 차례대로 돌려서 물었다. 아마도 힘이 약해서 빠져 나온 듯싶었으므로…….  

  방금 전까지 누워 있던 발판 위에서 이제는 일어서서 선반의 가공을 시작한 것이다. 이 때 승용차에서 점심 식사 전부터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다. 마침 내가 서있는 곳까지 다가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방금 전까지 제품을 끄집어내기도 힘들 지경이었으므로 그것을 어떻게 꺼내가도록 얘기를 할 것인가에 머리 속은 가득 차 있었지만 지금은 조금 의식을 회복한 상태였다. 몸이 이렇게 힘들게 지탱하기조차 힘든 정도로 녹진해 진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이 자신의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육신과 정신의 분리현상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중대한 상황.

  “못하겠으니 다른 곳에서 가공해 가세요!”

  “왜요? 어……. 다치셨네요?”

  그제야 그는 내 얼굴을 살펴보았는데 아마도 피투성이였으리라!


      6. 방 안에서…….

  3월에 있던 발작과는 조금 달랐지만 중간에 의지에 의하여 몸을 지탱할 수 있었는데 아마도 그 진도가 체 이르지 않았을까 싶었다.

  이렇게 같은 상태로는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몸이 정상이 아니었지만 3층으로 올라와서 자리에 누었는데 찢어진 얼굴의 상처에서는 응어리가 진 체 피가 뭉쳐 있었다. 피는 흘러나오지 않았지만 상처는 벌어져서 시간이 지날수록 굳어가는 느낌이었다.


7. 한편 자리에 누워 있는 머릿속에 벌레가 물어뜯는 통증이 일어나면서 그 충격파에 심한 고통이 동반하면서 세상의 모든 것이 그곳으로 꺼져버리는 듯했다. 그 가늘고 길며 신경을 물어뜯는 듯한 동반된 느낌으로 나는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깨어 있었다. 마치 의식을 잃은 것처럼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고통은 고스란히 내게 전달되어 왔으며 도무지 동반된 파형으로 나는 끝이 보이지 않도록 진동하고 있었다. 그 여운은 오랫동안 내 머릿속에 남아 있었고 다시 두 번째의 쥐어짜는 듯한 파형의 머리를 부셔놓을 듯한 통증으로 나는 혼미해져 갔다.

  아마 비몽사몽간이란 표현이 맞으리라!

  “아니 왜이래요!”

  아내가 놀라운 목소리로 말했는데 내가 다친 사실로 인하여 무척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 “내가 미쳐! 왜 이했어요? 도대체 왜 다친 거예요?”

  “응, 당신 왔어? 다친 건 별거 아니야! 이렇게 다친 것 때문에 누워 있는 게 아니고 먼저 병이 또 찾아 왔어……. 그래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누워 있는 거지!”하고 내가 말했는데 힘이 없고 눈을 뜨지 않은 채 신음을 하듯이 목구멍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은 그렇게 힘이 없었다.

  “찢어 져서 얼굴이 온통 피칠 인데……. 정말 병원에 가야지 이러고 있으면 어떻게 해요?”

머리를 조금만 흔들어도 극심한 어지러움이 동반되었는데 머리가 땅으로 꺼져 버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머리 속을 어지럼증이 강타를 하면,

  “욱!”하고 목구멍을 타고 음식물을 토해내야만 했다.

  점심 식사 전에 먹었던 팥빙수의 플라스틱 빈 통 한에 왈칵하니 점심 때 먹었던 알 밥과 음식물이 모두 토해 내었는데 한 통을 가득 채워서 다른 통 안을 절반 정도 체우고 나서야 겨우 멈추었으므로 조금 안심을 할 수 있었다.


  이런 극심한 어지러움은 지금 당장에 일어 난 것은 아닌 듯했다. 영등포역에서 1번 버스를 타고 김포 양곡에 갈 때도 나는 극심한 멀미로 구토를 하기 직전에 창문의 유리창을 열고 시원한 공기를 들이 마시면서 겨우 억제시킨 적이 있었다.

  그런 멀미와 같은 어지럼증이었다. 뱃속을 온통 토해낼 것 같은 매스꺼움.


  “머리에 다친 것은 문제될 게 없는데 먼저 어지럼증이 겹치게 일어나서 일어설 수가 없어!”

  아내가 계모임을 하기 위해 옆집에 O.M네 아주머니와 함께 대전광역시로 버스를 타고 갔다왔는데 집에 난장판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오전 10시에 나갔다가 오후 5시쯤 집에 돌아왔으므로 내가 머리를 다친 오후 1시 20분과는 많은 시간이 흘렀으므로 그동안 잠들기도 했던 것같다. 몸이 좀 개운한 듯 싶어서 일어나려고 하니 어지러워서 비틀거리다가 다시 자리에 덥썩 누웠다.

  그렇게 몇 차례 시도를 하면서 화장실에서 소변을 누웠다. 아내는 내가 누워 있는 동안 머리맡에 있던 상 위에 토해 놓은 토사물을 치웠던 것 같다.


7. 그녀는 계단을 타고 올라와서 농짝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려 누워 있는 남편을 보았다. 그런데 그녀는 작업복에 피 칠이 되어 있는 것이 눈에 거슬렸다. 바지와 반팔 차림의 T 샤쓰를 입고 있는 남편은 자신이 들어왔는데도 쳐다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일하다 말고 나갔으므로 그것이 화가 나서 삐져 있는 것이라고 짐작했었는데 상황이 자꾸만 안 좋은 쪽으로 흐는 는 것이어서 점차 놀라움과 충격에 빠졌다. 방안의 분위기는 뒤범벅이 되어 있었고 작업복을 입은 체 맨 바닥에 누워 있는 사람의 자세가 편해 보디지 않았다. 그리고 밥상에 놓여 있는 두 개의 빈 플라스틱 컵에 쏟아지듯 담겨 있는 토사물을 보는 순간 그녀는 그것이 무엇인가 자세히 보려고 다가갔다.

  “욱!”

  음식물을 토한 것이 분명했는데 두 곳에 담겨 있는 것이 보통 양이 아니었다. 끈적거리는 위산으로 음식물이 상한 것처럼 부패된 상태였다. 강한 냄새가 진동을 하였으며 비위가 상하여 그녀조차 토할 것처럼 입을 손으로 다물 정도였다. 그것은 남편이 토해 놓은 토사물이었으리라는 사실은 자명하였으므로 이제는 남편의 상태가 위태할 정도로 심각하리라는 사실로 급히 다가가면서 물었다.

  “어디 아파요?”

  그 때까지 남편은 반대편으로 돌아누워 있었으므로 상태를 확인할 수 없는 상태였다.

  ‘왜 그런 자세로 자신과 반대편으로 돌아누워 있었을까?’하고 처음에 무관심하게 느껴졌던 것이 이제야 알 듯 싶었다.

  긴박한 순간이었다. 그녀가 상황을 알게 된 아주 짧은 순간 모든 게 최악의 모습으로 부가되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