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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20년] 11. 러일전쟁②―무기력한 대한제국

조선땅서 러·일 전쟁중인데도 지도층은 우왕좌왕만
무력하고 무능한 지도자와 제 집마저 버리고 도망치는 백성…
소설가 송우혜
입력 : 2004.09.21 18:27 26' / 수정 : 2004.09.21 18:57 12'


 


▲ 한반도를 무대로 격전을 벌이는 유럽대표 러시아와 아시아대표 일본의 한판 싸움을 희화화한 러일전쟁 당시의 시사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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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2월 8일, 한국(Korea)의 제물포항을 빠져나오던 두 척의 러시아 순양함 바략 호와 코리츠 호가 일본 함대의 총공격을 받았다. 양국이 선전포고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국제법을 무시하고 일어난 사건이었다.

여러 시간의 피나는 전투―특히 러시아의 입장에서 볼 때―가 끝난 후, 러시아인들은 항복하기를 거부하고 그들의 배를 스스로 폭파시켜 버렸다.

러일전쟁의 포연은 한국 땅을 비켜갈 리 없었다. 2월 8일 여순항을 기습 공격하여 러시아 전함 2척과 순양함 1척을 파괴한 일본은 같은 날 인천항에 정박 중인 러시아 함대를 격침시켰다.

그 역시 기습작전이었다. 위 글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되는 신문 ‘이그재미너(Examiner)’의 러일전쟁 종군기자로 한국에 들어와서 크게 활약했던 잭 런던(Jack London·1876~1916)의 종군기 첫머리다.

당대 미국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던 ‘황야의 부름’이나 ‘강철 군화’의 작가로 널리 알려진 그는 러일전쟁 첫날의 모습을 그렇게 그렸다.

러일전쟁은 세계 전쟁사에서도 매우 희귀한 사례로 꼽히는 특이한 전쟁이다. 대륙의 노제국과 신생 일본 제국이 만주와 한반도를 놓고 격렬하게 맞붙은 이 전쟁은 모든 전투가 제3국인 대한제국과 청나라 영토 안에서 벌어졌다.

자기 땅을 전장으로 내준 대한제국과 청나라 모두 이 전쟁에 대해 ‘국외중립’을 선언했다는 것도 희한한 일이다.

승전국이 차지한 전리품 역시 패전국의 영토가 아닌 제3국의 영토였다. 당장 일본 수중에 떨어진 것은 여순·대련 지구였지만, 전쟁 발발 1년 후 대한제국은 을사보호조약으로 사실상 국토를 일본에 빼앗기게 된다.

‘국외중립’을 선언했다지만, 사실상 국제 사회의 외톨이였던 대한제국과 청은 이 제국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여순의 러시아 함대를 두려워했던 일본은 군함을 인천항으로 향했다. 일본 육군은 인천에 상륙하여 육로로 북진했다.


▲ 1904년 2월 8일 제물포항 밖에서 러시아 군함 바략호와 코리츠호가 침몰하고 있다. 일본 함대의 기습 공격을 받은 러시아 군함들은 항복을 거부하고 자폭의 길을 택했다.

일본군이 북상하는 길 일대에 사는 수많은 한국인들은 영문도 모른 채 일본군의 군수품 운반에 동원되는 등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뺨에 붉은 점을 친 자들은 선두의 선발부대를 따라랏!”

“너처럼 보라색 점은 공병대 소속이다! 혼동하지 마랏!”

일본군은 군수품의 소속을 쉽게 식별하려고 짐을 진 한국인들의 뺨에 부대별로 다른 색깔의 점을 칠했다.

일본군이 북진하는 길 연변의 마을들은 매운 추위가 몰아치는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산속으로 피란을 떠났다. 마을이 텅 비고 전쟁을 직접 치른 것 이상으로 황폐해졌다.

그러나 대한제국이 입은 피해는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에 멈추지 않았다. 외교력도 군사력도 없는 정부와 우왕좌왕하는 지도층의 모습이 서양 종군기자들의 보도를 통해 세계에 널리 알려지면서, 국제적 경멸의 대상이 된 것이다.

국제정치와 동맹에 의한 세력 구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자기 나라 땅이 외국군의 전장이 되었는데도 기껏해야 ‘국외중립’을 선언하는 것 이상의 행동을 보여주지 못한 지도층이 특히 웃음거리가 되었다.

집을 몽땅 비우고 멀리 피란하는 것 외엔 대응책이 없었던 가난한 백성들의 무력한 모습을 잭 런던은 이렇게 적었다.

“오늘날 전쟁은 인간사의 마지막 심판자이며 또한 국민성을 최후로 시험하는 관문이다. 이 시험에서 대한제국 국민은 실패했다. 외국 군대가 자기 나라를 통과해 가려고 하자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모두 도망갔다. 그들은 문짝이며 창문이며 할 것 없이 주워갈 수 있는 것 모두를 등에 지고 산으로 들어갔다. 후에 그들은 어쩔 수 없는 호기심에 끌려 구경하려고 마을로 내려온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로 단순한 호기심이었기에 약간의 위험만 느끼면 서둘러 도망친다. …한국의 북쪽 지방은 일본군이 통과할 때 이미 황폐해진 상태였다. 도시와 마을은 텅 비어 있었고, 논과 들은 버려져 있었다. 김을 매지도 않고 파종하지도 않았기에 들에는 녹색 식물이 아예 보이지 않았다.”


러일전쟁은 당시 전 세계인의 주목을 끌었던 대사건이었다. 저 먼 동쪽 끝, 아시아에서 새로 일어난 제국이 유럽 중심의 세계 체제에 도전하는 국가로 성장할 것인가.

영국은 일본과의 동맹을 통해, 언제나 유럽의 잠재적 적국이던 러시아를 어떻게 제압할 것인가.

또 미국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의 성장을 어디까지 지켜보고 지원할 것인가.

러일전쟁에 대해 유럽의 관심이 얼마나 컸는지는 당시 언론들이 한국과 청에 보낸 종군 기자들의 활약을 통해 읽을 수 있다.

사진 전송이 불가능하던 당시, 숱한 언론들이 생생한 현장 묘사도(일러스트레이션)로 독자들의 흥미를 자극했다.

지금 우리도 볼 수 있는 그 그림들을 보면 노회한 러시아와 팔팔한 일본의 한판 겨룸, 그리고 그 발밑에 깔린 한반도와 백성들 모습이 강렬하게 묘사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무력하고 무능한 지도자와 제 집마저 버리고 도망치는 백성…. 이렇게 부정적으로 형성된 나쁜 이미지와 국제적 여론, 그리고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손잡을 곳 하나 없었던 고립된 나라 대한제국.

그같은 보도 경쟁으로, 세계 각국의 시민층에까지 대한제국과 국민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이 국제적으로 광범위하게 형성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국운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1905년 1월에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헤이 국무장관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한국인들을 위해서 일본에 간섭할 수 없다. 한국인들은 자신들을 위해 주먹 한 번 휘두르지 못했다.” 그는 또 “한국인들이 자신을 위해서도 스스로 하지 못한 일을, 자기 나라에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을 위해서 해주겠다고 나설 국가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 소설가 송우혜

제물포 앞바다의 ‘패전’을 영웅적 항거로 윤색했던 러시아는 패전 꼭 100년 만인 올해 2월, 당당하게 인천 앞바다를 찾아왔다. 러시아 태평양 함대 소속 순양함 ‘바략’호는 100년 전 자폭 침몰했던 군함의 이름을 그대로 땄다.

연안부두에 러일전쟁 전사자 추모비가 섰고, 러시아 정교회 신부들과 러시아 해군 장병들이 화려한 추모행사를 가졌다.

미·일 동맹이 2차대전 후 어느 때보다 밀월을 과시하고 있는 한편으로, 주한 독일대사는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홀로 고립돼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 러일전쟁 발발 100년의 한국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