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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보드 4.0의 일기(日記) 이곳은 '제로보드 4.0'에 있던 내용을 추출하여 되올린 곳인데... 간혹 게시판의 하단 내용에 이상이 생긴다. 그렇지만 봉사로 있다가 무려 6년만에 다시 눈을 뜬 것만 같다. 또한 글을 쓰던 예전의 기억을 떠올려 볼 수 있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너무 기쁜 나머지 이정도만해도 과분한 것 같다.

1904년 2월 8일에 일본함대가 뤼순군항[旅順軍港]을 기습공격함으로써 시작되어, 1905년 9월 5일에 강화를 하게 된 러시아와 일본 간의 전쟁이다. 한국과 만주(중국 동북지방)의 분할을 둘러싸고 싸운 것이지만, 그 배후에는 영일동맹(英日同盟)과 러시아프랑스 동맹이 있었고, 제1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이었다. 러시아는 패배의 결과로 혁명운동이 진행되었고, 일본은 전승으로 한국의 지배권을 확립하고, 만주 진출이 확정되었으나 미국과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의 배경은 일본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서 세계적인 규모의 제국주의 단계로 들어섰으나, 그 당시 극동의 국제적 대립관계는 중국 분할경쟁을 둘러싸고 전개되었다.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삼국간섭(三國干涉)'에 의하여 일본의 만주 진출을 저지한 러시아는, 1895년 프랑스와 공동으로 4억 프랑에 달하는 대청차관(對淸借款)을 강요하고, 1896년에는 러청동맹밀약을 맺고 일본이 중국·한국·극동 러시아령을 침략할 경우 상호원조할 것을 약속, 만주 북부를 관통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동청철도(東淸鐵道)부설권을 획득하였다.

  98년 다시 러시아는 관둥저우[關東州]의 조차권(租借權)을 획득, 같은 해 독일이 자오저우만[膠州灣]을, 영국이 주룽반도[九龍半島]와 웨이하이웨이[威海衛]를, 다음해 프랑스가 광저우만[廣州灣]을 조차하기에 이르렀다. 뒤늦게 미국도 1899년에 문호개방선언을 발표하고 중국 분할에 가담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극동에서는 영국·미국 대 러시아·프랑스·독일이라는 열강의 대항관계가 형성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3국 간섭 이래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던 일본은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일본이 여전히 한국을 독점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청일전쟁 후 조선의 대외무역에서 일본은 수입의 60~70%, 수출의 80%를 차지함으로써 우세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이권(利權)면에서도 열강에 분할되는 이권을 최혜국대우 조항에 의해 획득하거나 위협함으로써 확보해 갔다.

  한편으로는 조선에 대한 경제적 지위를 확실하게 굳히면서 이를 군사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대(對) 러시아 전쟁을 상정한 군비확장에 주력했다. 일본은 청국으로부터 받은 전쟁배상금 3억 6,000만 엔 중 2억 2,000만 엔을 군비확장에 사용하고, 1896~1903년 예산세출의 평균 5할을 군비로 충당했다. 그러나 일본은 독자적인 힘으로 러시아와 싸워 승리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아시아에 대한 영국·미국의 이권을 지키는 헌병 역할을 스스로 떠맡고 나섰다. 이로써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외교적·군사적 지원을 받았을 뿐 아니라, 러일전쟁의 막대한 전비 17억 엔 중에서 8억 엔을 영국과 미국에서의 외채모집으로 보충했다.

  그리고 1900년 청나라의 의화단사건(義和團事件) 진압에 참가하게 되면서 드디어 열강의 대열에 끼어들었다. 그러나 일본은 아모이[厦門] 출병에 실패하고, 중국 본토에 대한 이권 획득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사태에 대처하기 위한 일본의 외교책으로서 러시아와의 타협을 모색하려는 러·일협상론과 영국과 제휴하여 러시아 견제를 노리는 영국일본동맹론이 대립되었으나, 결국 1902년 1월 영·일동맹이 성립되어 러시아와의 대립이 명확해졌다. 이 때문에 그해 10월 러시아는 의화단운동 이후의 만주 주둔군의 제1기 철병(撤兵)을 수행하였으나, 이듬해 4월의 제2기 철병은 보류한 채 만주의 독점적 지배는 물론, 압록강 연안에 진출하여 남하정책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리고 직접적인 원인은  러시아의 강경한 태도에 위협을 느낀 일본 국내에서는 주전론과 반전론으로 국내 여론이 양분되는 듯하였으나, 세론의 대세는 차차 주전론으로 기울어져가고 있었다. 1903년 6월 23일 정부의 주요 각료·원로들의 어전회의(御前會議)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우선권과 만주에 대한 러시아의 우선권을 각각 인정하는 만·한교환론(滿韓交換論:사실은 한국을 일본의 지배하에 두고, 만주에서는 러시아의 지배력 약화를 노렸음)에 의한 대(對)러시아 교섭을 결정하였다.

  러시아는 이에 대해 8월 극동총독부를 설치하여 일본에 대응하였고, 그 후 여러 차례에 걸친 양국의 교섭은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해를 넘겼다. 그 동안 일본에서는 육군을 중심으로 전쟁준비가 진척되었으나, 그것은 일본의 경제력에 비추어 군사행동을 남만주에 한정한다는 전제에 입각한 계획이었다. 그리고 전쟁에 앞서 대한제국정부는 1904년 1월 21일 국외중립을 선언하고 열국에게 통고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를 무시하였다.

  전쟁은 1904년 2월 4일 일본은 대(對)러시아 개전(開戰), 국교단절을 결정하고, 8일에는 육군 선발대가 한국의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로 향하고, 한편 뤼순의 러시아 함대 중 전함 2척과 순양함 1척을 파괴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어 10일 러 ·일 양국으로부터 선전 포고되었다. 서전에서 일본군은 한국을 제압하고, 한국에 2월 23일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강요해 유리한 전략체제를 확립하였다.

  4월 하순 한국에 상륙, 북상한 일본 제1군은 5월 초 압록강 연안에서 러시아군과 충돌하여 격파했고,5월 18일 대한제국정부로 하여금 러시아와 체결했던 모든 조약과 러시아인에게 부여했던 모든 이권의 폐기 혹은 취소를 공포하게 했다. 그리고 같은 달 랴오둥반도[遼東半島]에 상륙한 제2군은 난산[南山] ·다련[大連]을 점령하고 뤼순을 고립시켰다. 다시 6월에는 만주군 일본총사령부를 설치하고 15개 사단을 동원하였다. 8월 랴오양[遼陽] 부근에서 양국군이 첫번째 대규모적인 접전을 벌였고, 10월의 사허후이전투[沙河會戰鬪], 1905년 1월의 헤이거우타이전[黑溝臺戰] 등의 전투에서 일본군은 고전 끝에 모두 승리하였다.

  한편 뤼순의 러시아 함대는 블라디보스토크로 탈출을 꾀하였으나, 8월 황해에서 일본 해군의 총공격을 받고 항구 안에 봉쇄당하였다. 뤼순 공략을 맡은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의 제3군은 여러 차례에 걸친 203고지 공격으로 많은 손실을 보았지만 1905년 1월 드디어 공략에 성공하였다. 유럽으로부터 지원군을 얻은 크로파트킹 지휘하의 러시아군 32만과 오야마 이와오[大山嚴]가 이끄는 일본군 25만은 3월에 펑톈[奉天:현 瀋陽]에서 회전(會戰), 러시아군이 패퇴하였으나 일본군도 사상자가 7만에 이르는 큰 손실을 보았다. 한편 러시아는 육전(陸戰)에서의 패배를 해전에서 만회하려고 로제스트벤스키 지휘하의 발틱함대를 회항시켜 5월 27,28일 대한해협에서 대해전을 전개하였으나,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가 이끄는 일본 연합함대에 격파되어 전멸하였다.

  결국 러 ·일 양국의 전쟁 수행능력은 펑톈 회전 전후부터 한계에 이르렀다. 특히 러시아는 계속되는 패전으로 사기가 침체되고 그 해 1월 ‘피의 일요일’로 비롯된 군대의 반란과 농민폭동(제1차 혁명)이 일어나 혁명 진압이 급선무였다. 약 20억 엔[円]의 전비(戰費) 가운데 12억 엔의 공채 모집에 응함으로써 일본을 지원하였던 영국 ·미국도 일본의 승리가 만주의 단독 점령으로 발전할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리하여 미국 ·프랑스는 3,4월경 러 ·일 양국에 강화할 것을 종용하였고, 동해해전(東海海戰) 후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인 미국 대통령 T.루스벨트의 알선으로 8월 포츠머스 강화회의가 열렸다. 일본의 전권(全權)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 외상, 러시아의 전권 비테 전 재무장관이 참가하여, 남 사할린섬의 할양(割讓)을 내용으로 한 조약이 9월 5일 조인되고, 16일 휴전이 성립되었다. 그 결과 일본은 한국지배권의 확립과 남만주 진출이 결정되고, 이것이 동시에 대륙의 권익을 꾀하는 미국과의 대립을 가져왔다.